전 KGB요원 독극물 암살 배후로 지목… 언론은 푸틴 관련설까지 제기 공세
러시아 연방안보부(FSB) 요원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알렉산더 리트비넨코 사망 사건을 둘러싼 러시아와 영국 간 갈등이 일파만파다. 사건을 조사하던 영국 당국이 사망한 리트비넨코의 몸에서 희귀성 방사능 물질 ‘폴로늄 210’이 검출됐다고 발표, 사건의 배후에 러시아 정부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영국의 ‘정치적 도발’이라고 강하게 맞섰다. 그런 가운데 러시아 전 총리가 독극물에 중독되는 등 새로운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의혹을 키우면서 양국간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형국이다.
사건의 전말 리트비넨코는 11월 1일 밖에서 음식을 먹고 돌아온 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날 리트비넨코는 총 4명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오전에는 런던 밀레니엄호텔에서 친구인 전직 크렘린 경호원 안드레이 루고보이씨와 만났다. 그 자리에는 루고보이씨와 함께 나온 다른 러시아인이 있었다.
그들은 함께 차를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오후에 리트비넨코는 런던 피카디리 광장에서 이탈리아인 마리오 스카라멜라를 만났다. 10월 7일 체첸에서 러시아 당국의 만행을 폭로하려다 살해당한 러시아 여기자 안나 폴리콥스카야 사건과 관련한 서류를 넘겨받기 위해서였다. 리트비넨코는 폴리콥스카야를 살해한 범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스카라멜라로부터 폴리콥스카야 사건의 용의자들로 FSB 요원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전달받았다.
둘은 인근 초밥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통증을 느낀 것은 집으로 돌아와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리트비넨코는 곧바로 병원에 달려갔지만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17일 대학병원으로 옮겼으나 5일 만인 23일 그는 결국 사망했다.
병원에서는 리트비넨코가 독소에 중독됐다는 소견을 내놓았고 영국 경찰은 의사의 소견을 바탕으로 리트비넨코 사망사건을 ‘독살 의혹 사건’으로 규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영국 보건청은 24일 리트비넨코의 소변에서 희귀 방사성 물질 ‘폴로늄 210’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러시아에 의혹 영국 경찰은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러시아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리트비넨코가 ‘러시아를 배신한 스파이’란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KGB 요원이던 그는 2000년 러시아 신흥재벌 베레조프스키 암살 지시를 폭로한 뒤 영국에 망명했다. 2002년에는 ‘러시아 폭파하기: 내부로부터의 테러’라는 책을 내고 FSB가 1999년 300명 이상을 희생시킨 러시아 아파트 폭파 사건을 조종했다고 폭로했다. 러시아 정부는 그동안 이 사건을 체첸 반군에 의한 테러라고 주장해왔다.
러시아는 그간 주요 정치인 독살 사건의 배후로 알려져왔다. 2002년 체첸 반군 지도자 하타프가 KGB에 의해 독살당했다. 2004년에는 폴리콥스카야가 항공기 내 독이 든 음료수를 마신 적이 있다. 같은 해 우크라이나 당시 야당 지도자 빅토르 유첸코가 선거 유세 중에 음료수를 마시고 다이옥신에 중독돼 독살될 뻔했다. 리트비넨코는 2004년 “KGB에서 독극물은 권총과 같은 무기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폴로늄 210은 전 세계적으로 연 100g 정도만 생산되는 희귀 물질이다. 라듐보다 5000배 이상 강력한 방사능을 내뿜는 물질로 추출에는 상당한 핵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국 경찰이 리트비넨코 살인자가 러시아 정부의 후원을 받은 독극물에 정통한 전문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다.
“독살” vs “정치적 도발” 그렇잖아도 에너지 사업을 국유화하면서 ‘에너지 무기화’에 나서고 있는 푸틴을 마뜩찮게 지켜보던 영국이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필요하다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며 “수사를 방해하는 외교적·정치적 장벽은 없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은 이미 러시아 정부가 개입된 독살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영국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리트비넨코의 죽음에 푸틴이 관련됐다는 주장이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라고 보도했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리트비넨코 사망 사건과 관련 “푸틴이 무고함을 직접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푸틴 대통령 개입설’ 등을 포함한 5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푸틴을 압박하고 있다.
러시아도 발끈했다. 푸틴 대통령은 “한 사람의 비극적 죽음을 정치적 선동에 이용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대통령 공보관 세르게이 야스트르젬프스키도 “러시아의 위신을 손상시키기 위한 ‘계획된 음모’”라며 영국을 비난했다. 러시아 일간 ‘프라우다’는 “이 사건이 러시아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KM뉴스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서 ‘리트비넨코의 독살 사례는 러시아 스파이들이 영국 땅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증거다’라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쓰고 있다”면서 “영국 언론은 편집증 환자”라고 일갈했다.
누가 범인 영국 정부가 국가 비상대책위원회인 ‘코브라’까지 소집했지만 사건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고 있다. 독살의 배후를 놓고 다양한 시나리오만 난무하는 상황이다. 영국에서는 푸틴 대통령 개입설을 가장 강하게 의심하고 있지만 러시아 정보요원이 독자적으로 사건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리트비넨코가 FSB 활동을 비난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보복을 했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러시아 정보기관은 독자적 행동을 하지 않는 강한 전통을 갖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영국에 망명한 러시아 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의심하고 있다. 그는 1991년 망명한 이후 줄곧 ‘반(反) 푸틴’ 입장에 서왔다. 리트비넨코와도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친(親) 푸틴’ 인사는 리트비넨코의 죽음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인사를 베레조프스키로 꼽는다. FSB 간부 출신 니콜라이 코발요프 하원의원은 TV에 출연해 베레조프스키가 독극물 사건 배후에 러시아 정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에게는 리트비넨코 독살사건을 러시아 소행으로 돌리는 게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자살 가능성도 나온다. 푸틴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리고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을 널리 주지시키기 위해 리트비넨코가 자작극을 꾸몄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
이 가운데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11월 24일 아일랜드에서 회의를 하다가 쓰러진 예고르 가이다르 러시아 전 총리가 독극물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는 야당 소속으로 자유주의 성향의 인사다. 리트비넨코 독살 사건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지 새로운 사건 발생의 전조가 될 지 지켜볼 일이다.
<김정선 기자 kjs04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