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의 전쟁’이 테러범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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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폭력적 중동정책이 유럽 내 젊은 모슬렘을 극단주의로 몰아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하며 테러를 척결하겠노라 공언했던 서구 선진국들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영국 런던경찰국은 8월 10일 승객을 가장해 폭발물이 담긴 휴대물품을 기내로 반입한 뒤 여객기를 공중에서 폭파하려던 테러 용의자 24명을 사전 적발, 체포했다. 이들은 폭발물을 휴대한 채 10여 대의 여객기에 나눠 탄 뒤 동시다발로 폭탄을 터뜨릴 계획이었다. 경찰 관계자의 말대로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대량 살인”이 일어날 뻔했다.

영국은 지난해 7월 7일에도 런던시내 한가운데서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해 시민 52명이 목숨을 잃었다. 불과 1년 남짓 만에 또 다시 무차별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이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번에 적발된 17~35세의 용의자 중 19명이 영국인이라는 사실. 7·7테러를 저지른 용의자 4명도 모두 파키스탄계 영국인이다. 영국은 테러의 목표물인 동시에 테러리스트 양성소가 되고 있는 셈이다.

알카에다가 주도했나 테러 음모가 적발됐다는 뉴스와 함께 어떤 인물이 가담했는지에 대한 온갖 추측 보도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첫 번째 반응은 미국에서 나왔다. 마이클 처토프 미국 국토안보부 장관은 여객기 공중폭파 음모가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계획이 치밀하고 가담 인원이 많은 점, 활동범위가 국제적이라는 점이 알카에다와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로버트 뮐러 FBI 국장도 이번 음모에서 알카에다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영국은 “결론을 내리기에 너무 이르다”며 좀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미국에 이번 사건에 관한 발언을 삼가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테러의 책임을 알카에다에 돌리며 사태를 단순화하는 미국과 대조적인 태도다.

외신은 익명의 파키스탄 관리의 말을 인용해 테러 용의자 중에 알카에다의 지도자급 인물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아직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 런던경찰국이 테러계획의 전모에 대해 공식 브리핑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문제를 바로 인식하기 위해 알카에다의 개념 자체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알카에다가 9·11테러 때와 같은 상명하복의 조직 차원을 넘어 뚜렷한 구심점 없이 전개되는 국제적 사회운동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마크 세이지먼은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파괴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알카에다는 이제 없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국경을 넘어 발생하는 무차별 테러를 점점 많은 젊은이가 가담하고 있는 ‘세계적인 사회운동’이라고 일컬으면서 알카에다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치른다며 미국과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퍼부어도 테러를 발본색원할 수 없는 이유다.

‘내부의 적’을 키웠다 이번에 적발된 용의자 대부분이 영국시민이라는 점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테러리스트는 미국·영국 정부의 바람과 달리 아프간이나 이라크가 아닌 바로 옆집에도 살 수 있다. 이른바 ‘자생적 테러조직’이다.

전문가들은 자생적 테러조직이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서방국가의 외교정책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런던 모슬렘센터 대변인은 “아프간, 이라크 등지에서 미군 주도 연합군이 벌이고 있는 무력 행사가 일부 사람을 폭력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주도의 중동정책에 불만을 품은 유럽의 젊은 모슬렘이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들고 있다는 얘기다.

테러음모 적발 이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모슬렘 정치인도 “이라크 붕괴 및 다른 중동정책이 시민을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다”며 외교정책의 변화를 촉구했다. 미국·영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이 오히려 테러범을 키우는 양분이 되고 있는 셈이다.

서구사회가 모슬렘 이민자들을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도 자생적 테러조직이 생겨나는 원인으로 꼽힌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일부 성공한 이민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모슬렘의 실업률이 다른 종교인보다 높다. 영국에 사는 16~24세 모슬렘의 실업률은 28%다. 반면 같은 연령대의 전체 영국인 실업률은 12%다.

무고한 모슬렘 이민자까지 마치 테러범처럼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선도 모슬렘의 분노를 키우는 요인이다. 영국에서 2001년 반테러법이 시행된 이후 런던경찰국이 체포한 사람은 1047명. 대부분이 모슬렘인데 이중 기소된 사람은 158명에 지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한 한 영국 모슬렘은 “7·7 런던 지하철 테러 이후 전통 모슬렘 복장을 하거나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인권 위협받는 모슬렘 테러 용의자가 모슬렘으로 밝혀지면 모슬렘을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진다. 이는 다시 모슬렘에 소외감과 분노를 안겨준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번 비행기 테러 적발 이후에도 공항 보안검색 문제를 놓고 비슷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한층 까다로워진 보안검색 때문에 항공편이 연착되거나 심지어 취소되는 경우가 빈발하면서 승객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기다림에 지친 공항 이용자는 물론 영국 정부에서도 특정인물만 골라내서 수색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검색방법이 도입되면 당국은 의심스럽게 행동하는 사람, 여행 패턴이 특이한 사람뿐만 아니라 특정민족 혹은 종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을 선별해 수색한다. 어린이나 노인이 테러를 저지를 확률은 낮으므로 모든 사람을 수색하느라 시간을 보내느니 이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경우 피부색이 검거나 종교 복장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장시간 수색당하고 심지어 억류될 수도 있다. 노동당 소속의 아랍계 정치인 샤히드 말리크가 “모든 보안검색 조치는 ‘턱수염’이 아니라 정보에 기반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자국에 들어오는 외국인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지문과 사진을 요구해 인권침해 논란을 불러 일으킨 전례가 있다. 수위는 다르더라도 영국 또한 이런 선례를 따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테러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철저한 보안의식일 수도 있지만 도를 넘을 경우 모슬렘이라면 일단 의심하고 집중 수색해야 한다는 집단 히스테리로 빗나갈 수 있다. 1980~90년대 아랍계 망명자를 스스럼없이 품어줬던 나라 영국은 지금 시험대 위에 올랐다.

<국제부/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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