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전 테러 대비 대규모 연구센터 건립, 대량살상무기 금지협약 주도할 땐 언제고…

지난해 이라크 키크루크에서 미군 병사에 대한 탄저균 백신 접종을 실시하는 모습.
불특정 다수의 희생은 물론 사회적 혼란을 부를 수 있는 생물무기는 지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 합의 아래 사용과 생산이 중지됐다. 그러나 최근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가 비밀리에 대규모 생물무기연구소를 건설 중이란 사실이 밝혀져 국제사회의 우려를 낳고 있다.
‘세계의 보안관’ 역할을 자처해온 미국이 대량살상무기, 그것도 자국이 주도해 금지협약을 성사시킨 생물무기 분야에서 규칙 위반을 선도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생물무기에 대한 공포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국토안보부 산하 ‘국립생물학방위분석대응센터’가 지난 6월 워싱턴 인근 군기지에 대규모 생물무기 실험실 건물 공사를 시작했다고 7월 31일 보도했다.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메릴랜드주 포트 데트릭에 짓는 연구소는 총 1억2800만 달러를 들여 8층 높이, 4500평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구소가 들어서는 포트 데트릭 기지는 미국의 생물무기 생산이 중단되기 전까지 생산을 주도했던 군기지이기도 했다.
공사가 마무리되는 2년 후에는 인체에 치명적인 각종 세균이 다량으로 보관되고 세균 실험용 동물도 수용된다. 이 연구소에서는 외부인의 출입과 감독을 철저히 차단한 세균전 실험실이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소 업무 가운데는 생물적 위협이 되는 새로운 병원균과 유전자 조작 병원균,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연구와 동물실험뿐 아니라 적대 세력에 대한 모의공격 훈련 등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생물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1969년 생물전 정책 발표후 생물무기 생산을 중단해왔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곳곳에서 탄저균 편지가 배달되면서 미국은 다시 생물무기에 눈을 돌리게 됐다. 2001년 10월 탄저균에 오염된 편지가 처음 발견된 이후 탄저균 의심 편지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한때 미 전역이 탄저균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탄저균 테러로 총 4명이 사망하고 17명이 감염증세를 보였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은 탄저균 테러가 이어지면서 과학적인 분석과 평가를 위해 생물학방위분석대응센터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 센터는 세균전 테러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병원균 실험과 대응전술을 연구하는 등 조직을 계속 확대했다.
생물무기란? 생물무기는 인체에 유해한 미생물이나 독소를 전파해 사람과 동·식물을 살상하는 무기다. 역사 속 생물무기로는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페스트균, 미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탄저균, 식중독을 일으키는 보툴리누스균, 생산이 용이하고 간단한 접촉만으로도 쉽게 확산되는 천연두균 등이 대표적이다.
전쟁에서 생물무기를 사용한 사례는 17세기 박테리아가 발견되기 훨씬 전인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의 카파항을 공격하던 몽골군이 페스트로 죽은 시신을 투석기로 던져 넣으며 유럽 전체에 급속히 페스트가 확산된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6세기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가 멕시코 원주민에게 천연두를 퍼뜨리며 완승을 거뒀고, 영국인도 미 대륙에서 원주민인 인디언을 쫓아낼 때 천연두를 전염시켰다. 1930년대 일본은 독자적으로 실험한 생물무기를 중국과 만주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미국 샌디아 국립 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탄저균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생물무기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비인도적인 무기로 비판받았다. 특정 표적만 공격하는 재래식 무기와 달리 무차별적인 데다 전염성 질병이 확산될 수 있어 민간생활에 대한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 혼란과 질서 파괴까지 야기할 수 있는 위험성도 높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생물무기의 잔혹성을 몸으로 경험한 국제사회는 규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러한 논의를 주도하고 나선 나라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생물무기 포기와 비축 무기 폐기를 선언하면서 세계 각국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며 협약 비준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생물무기금지협약(BWC)이다. 생물무기금지협약은 핵확산방지조약, 화학무기금지협약 등과 더불어 대량살상무기금지협약의 하나로, 국제법상 최초의 특정 대량살상무기금지조약이기도 하다. 생물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세균·곰팡이 등의 개발과 저장·획득·비축·생산·이전을 철저히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각 협상 당사국이 보유하고 있는 생물무기의 완전 폐기를 목표로 한다.
1972년 런던과 모스크바, 워싱턴에서 서명된 뒤 1975년 3월 26일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 등 153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총회는 5년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1987년 6월 협약에 가입, 1992년부터는 신뢰구축체제에 참여해서 생물학연구 개발 프로그램과 백신시설 등을 해마다 공개하고 있다. 북한은 우리보다 3개월 앞서 1987년 3월에 가입했으나 신뢰구축체제나 특별그룹 회의 등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구원이냐, 재앙이냐 미국의 비밀 생물무기연구소 건설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기된 논쟁에서 가장 미묘한 문제는 미국의 생물무기연구소의 건설이 생물무기금지협약의 위반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미 국토안보부는 협정 내용상 평화적 목적으로 생물학무기를 연구하는 것은 허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연구소에서 앞으로 진행될 연구가 테러방지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합법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본받아 경쟁적으로 생물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면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메릴랜드 대학 공공정책학과의 밀턴 레이텐버그 교수는 “이런 종류의 실험을 다른 나라가 한다면 국제법 위반이라고 한다”며 “우리가 이런 일을 하면 이란과 북한이 비밀리에 세균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며 비난해온 것이 우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수많은 인명을 구하려는 연구소의 목적이 자칫 새로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1979년 생물무기시설에서 누출된 탄저균 포자로 인해 6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가 ‘평화를 위한 생물무기연구’라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9·11테러 이후 생물무기연구를 꾸준히 확대해왔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연구소 설립 계획을 쉽게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미국은 자신이 차린 상을 스스로 뒤엎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국제부/박지희 기자 viole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