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판결 100주년 맞은 프랑스, 이민자·소수민족 대한 불관용과 증오 ‘여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드레퓌스 복권 10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세계적인 문호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프랑스 일간 ‘오로르’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기고했다. 글의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J’accuse)’. 반역죄 누명을 쓰고 수감 중이던 포병대위 알프리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이다. 졸라의 이 글은 프랑스의 양심을 흔들었고 결국 드레퓌스는 혐의를 벗었다. 관용과 정의의 상징이 된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이다.
지난 7월 12일은 1906년 대법원이 드레퓌스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지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사관학교 에콜 밀리테르에서 열린 복권 100주년 기념식에서 “억울한 누명을 씌워 드레퓌스 대위를 재판에 회부한 것에 대해 당시 프랑스 정부를 대신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이 사건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거부이자 인권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유대인 신분이기에 100년간 논란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드레퓌스가 갖는 의미와 위상을 국가 수장이 명백하게 인정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드레퓌스를 널리 기리는 분위기는 100주년을 전후해 개최되는 각종 행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서적 15권이 발간됐고 대법원은 100년 전의 무죄판결을 자축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드레퓌스의 무덤을 국가적 영웅이 묻혀 있는 팡테옹으로 옮기자는 운동도 활발하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서야 대통령이 사죄했다는 것은 이 인물이 100년간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논란에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드레퓌스 대위가 체포된 것은 1894년 10월이다. 프랑스의 군사기밀이 적힌 편지를 독일군에 팔아넘겼다는 혐의였다. 당시 프랑스는 프랑코-프러시아 전쟁의 상처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게다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통일 독일은 나날이 세력을 키워갔다. 때마침 발견된 독일행 ‘비밀서신’은 프랑스 내에 불안과 히스테리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군사법원은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증거는 편지 글씨체가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뿐이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으로 이송됐다. 빠삐용이 탈출하려고 애썼다던 바로 그 감옥이다.
군부는 후일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는 확증을 잡았지만 진상 발표를 거부했다.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사건은 그대로 묻힐 수도 있었다. 졸라조차 명예훼손으로 1년형을 복역하게 했던 이 글은 프랑스 사회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정의와 진실을 외치는 드레퓌스파가 한편이라면 다른 쪽은 국가 이익과 군의 명예를 주장하는 반(反) 드레퓌스파였다. 반 드레퓌스파는 유대인을 혐오하는 극우파와 극단적인 가톨릭 신자가 주를 이뤘다. 비판적 지식인의 노력으로 드레퓌스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당시 반 드레퓌스파가 보여줬던 반 유대주의와 앵톨레랑스(불관용)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인종차별주의는 2차 세계대전을 더욱 비극적인 전쟁으로 만들었다. 드레퓌스가 평온하게 삶을 마감한 1935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뒤, 나치 괴뢰정권인 비쉬 정부는 프랑스 내 유대인 7만6000여 명을 나치 수용소로 추방하는 데 협력했다. 이중에는 드레퓌스의 손녀도 포함됐다. ‘더 타임스’는 이들 프랑스 파시스트가 반 드레퓌스파의 사상적 후손이라고 지적했다.
극우정당 당수 “이민자 모조리 추방”
지난해 10월 파리 교외에서 벌어졌던 이민자와 빈곤층 젊은이의 방화시위는 프랑스의 이면을 드러내는 대표적 사건이다. 이민자는 대부분 사회 중심에서 소외돼 대도시 주변의 빈민가에 거주하고 있다. 소수민족을 배려하기 위해 실시됐던 각종 할당제도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간 23개 빈민지역 출신 고등학생에게 입학할당제를 시행했던 파리 정치대학은 그 비율을 점점 줄여가고 있다.
프랑스에 만연한 실업문제도 이민자와 소수민족에게 먼저 여파가 미친다. 2004년 파리 소재 정책연구소 ‘몽테뉴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의 실업률은 30%에 달했다. 이는 전국 평균의 2배를 웃도는 수치다. 구직자 258명 중 75명은 이민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력서에 프랑스식 이름을 사용했고 오직 14명만 본래 아랍식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2003년에는 정부가 코트디부아르 및 세네갈 출신 불법 이민자 54명을 전세기에 태워 출신국으로 강제 송환해 인권단체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민자와 소수민족에 대해 불만 여론이 높아간다는 사실은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미 확인됐다.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리오넬 조스팽 사회당 총리는 3위로 주저앉으며 고배를 마셨다. 그 대신 결선투표에 진출해 시라크 후보와 맞붙은 이는 놀랍게도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당수 장 마리 르펭 후보였다. 그는 이민자를 모조리 추방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비판적 지식인을 ‘질리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인종주의의 부흥은 급기야 세계인의 축제라는 월드컵 결승전마저 ‘지단 박치기’ 사건으로 얼룩지게 했다. 프랑스 월드컵팀의 주장으로 뛰던 지네딘 지단은 이탈리아와 결승전에서 마르코 마테라치와 말싸움을 벌이다 상대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아 퇴장당했다.
이 사건 초기 외신들은 마테라치가 지단에게 인종주의적인 모욕을 준 게 아니냐고 추측했다. 그가 프랑스 주류사회에서 보기 드문 알제리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르펭 국민전선 당수도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프랑스 월드컵 축구팀이 프랑스를 과도하게 대표하고 있다”고 발언해 입방아에 올랐다.
시라크 대통령은 100주년 기념 연설에서 “불관용과 증오에 대한 싸움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며 “드레퓌스 사건을 되새기며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는 관용과 정의의 국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억울한 이에게 누명을 씌웠던 100년 전으로 퇴행할 것인가. 최근 프랑스 사회의 보수화 경향이 뚜렷해지는 가운데 드레퓌스 복권 100주년이 뜻깊게 다가온다.
<국제부/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