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우 상인에게는 특별한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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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대인’으로 불리며 대륙경제 대표주자… 저가 이미지 벗어나 브랜드 가치 높이기

원저우의 저압변압기 제조업체 정타이그룹 근로자들이 제품을 조립하고 있다.

원저우의 저압변압기 제조업체 정타이그룹 근로자들이 제품을 조립하고 있다.

'돈이 되면 어디든 간다.’

‘중국의 유대인’이라는 원저우(溫州) 상인을 일컫는 말이다. 평양의 제일백화점 운영권을 따낸 것도 원저우 상인이다. 최근 개통한 칭장철로 덕분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에도 4000여 명의 원저우 상인이 일찌감치 진출했다.

중국 동부 연안 지방의 항구도시 원저우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저장성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는 푸젠성에 더 가깝다. 말도 저장 방언이 아니라 주로 푸젠 사람들의 민남어를 쓰고 있다. 천연자원이 거의 없으면서도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대만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당국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소외된 땅이었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원저우는 저장성은 물론 중국 경제의 대표주자로 우뚝 서고 있다. 어떤 일도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원저우 상인들의 불굴의 투지와 정신력 덕분이다.

200만 명 상인 전 세계 누벼

원저우 상인들은 ‘낮에는 사장, 밤에는 마룻바닥에서 잔다’는 창업정신을 갖고 있다. 집안 사정이 어렵거나 회사에서 잘리면 다른 지방처럼 관(官)을 찾아가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알아서 일단 좌판을 벌리고 본다. 현재 원저우에는 개체호(종업원 8명 미만)가 24만여 개, 민영기업(종업원 8명 이상)이 13만여 개에 이른다. 전체 37만 개에 이르는 민영기업은 원저우시 전체 기업의 98.8%를 차지하고 있다.

구두 생산 중국 전체의 8분의 1

원저우 상인들은 고향에서 일이 풀리지 않으면 거침없이 중국 내는 물론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외국에 40만 명, 국내에 160만 명 등 총 200만 명이 국내외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원저우 전체 시민(2004년 말 현재 137만 명)보다 더 많다.

원저우에서는 최근 들어 ‘밤에 마룻바닥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 칠판을 바라본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뭔가 배우겠다는 일념하에 대학의 MBA 과정을 찾아다니며 ‘주경야독’하는 민영기업인이 늘고 있다는 말이다. 원저우의 대표적인 구두제조업체인 캉나이그룹의 정라이 부총재는 “원저우의 상인 정신은 끊임없는 품질혁신 노력에다 세계시장을 파고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저우 도심에 있는 캉나이 구두 전문 판매장.

원저우 도심에 있는 캉나이 구두 전문 판매장.

원저우는 경공업 중심의 도시다. 3000여 개의 회사가 금속 라이터와 안경, 면도기 등 3대 품목의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다. 지난해 이들 품목의 매출액은 104억 위안(약 1조2480억 원)을 기록했다. 선글라스를 포함한 안경은 세계시장의 70%를 차지했다. 세계에서 4명 중 1명꼴로 원저우산 안경을 쓰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금속 라이터는 연간 8억 개를 생산해 세계시장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면도기는 중국 생산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중 60%를 수출하고 있다.

원저우에서 생산한 라이터, 안경, 면도기 등을 전시하고 있는 오리스 전시장의 추안순 부총경리는 “원저우산 제품은 기술혁신을 통해 국제 가격보다 5분의 1~8분의 1 가격으로 생산된다”고 전했다.

관 개입 최소화 철저한 시장논리

‘호랑이’표 라이터로 유명한 다후 라이터 공사. 창업자인 저우다후 회장이 1992년 아내의 실업수당으로 받은 5000위안을 종잣돈으로 창업해 12년 동안의 노력으로 원저우 최대의 라이터업체로 부상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창업 당시 3500여 개이던 라이터업계는 14년 만인 지금은 400여 개로 줄었다. 경쟁력을 갖춘 기업만 살아남는 것이다. 다후 라이터는 물류비와 원가 절감을 위해 지금도 공장 반경 5㎞ 안에 부품업체 50여 개를 포진시키고 있다. 부품업체에 생산을 맡기면 원가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후가 부품을 직접 생산하면 개당 평균 원가가 1펀(1.2원)이지만, 부품업체가 생산하면 0.6펀(0.72원)에 불과하다.

원저우 종합시장인 상마오청의 옷가게.

원저우 종합시장인 상마오청의 옷가게.

원저우에서 1994년 탄생한 캐주얼 복장 브랜드인 ‘미터스·본위’는 본사가 디자인과 판매만 담당할 뿐 생산은 하청업체에 주고 있다. 원가절감을 위해 미국의 나이키가 하는 방식을 본 뜬 것이다.

원저우는 구두 제조기지로도 유명하다. 중국 전체 생산량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구두 수선공 출신의 정슈캉 회장이 창업한 캉나이그룹과 역시 구두수선을 하던 왕전타오 회장이 창업한 아오캉그룹은 원저우 구두의 양대산맥이다.

원저우의 종합시장 격인 ‘원저우 상마오청(商貿城)’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두재료 가게를 보면 원저우 구두의 경쟁력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가죽과 구두 액세서리, 신발끈 등 각종 구두재료를 시중보다 10~15% 이상 싸게 파는 만큼 규모의 경제를 꾀할 수 있다.

작은 도시 원저우가 중국을 대표하는 경공업 기지가 된 것은 기업인들의 정신에다 현지 정부의 정책도 한몫을 했다. 중국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원저우 모델’을 도입한 것이다.

원저우 종합시장인 상마오청의 구두가게.

원저우 종합시장인 상마오청의 구두가게.

원저우시는 민간인들의 창업을 최대한 장려하면서 관이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꺼렸다. 업체들이 난립해 과열경쟁을 벌여도 시장의 논리에 맡겼다. 민간인을 내버려두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지원이라고 원저우 시관리들은 강조했다. 물론 ‘짝퉁’ 제품이 나오는 것에는 과감하게 개입했다. 품질만이 살길이라는 각오로 품질검사 기관을 만들어 단속을 강화했다. 다른 지방이 재정 수입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짝퉁제품 단속에 소극적이고 중앙에서 단속반이 나왔을 경우에는 미리 귀띔해주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우충 다후 라이터 부총경리(부사장)은 “원저우는 더 이상 1회용 등 저가용 라이터 생산을 하지 않는다. 중고가 라이터에 승부를 걸고 있다”며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저우는 지금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구두제품 등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반덤핑 제소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헐값에 수출했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함께 중국 전역의 아파트 값을 부채질하면서 너무 돈을 밝힌다는 ‘원저우 투기꾼’이라는 오명에도 시달리고 있다. 발빠른 원저우 상인들은 생산 원가가 오르는 현실을 감안해 원저우를 떠나 근거지를 서부지역으로 옮기는 등 살길 찾기에 부심하고 있다. 원저우 경제규모가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는 것도 원저우 상인들이 고향을 떠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원저우 상인들이 환경변화에 따른 도전을 어떻게 이겨낼지 주목된다.



정타이그룹 난춘후이 회장 성공 스토리

[월드리포트]원저우 상인에게는  특별한 게 있다

중국의 ABB를 꿈꾸는 저압변압기 제조업체 정타이그룹의 창업자인 난춘후이 회장을 6월 20일 원저우 본사에서 만났다. 키는 165㎝지만 당당한 체격의 난 회장은 1963년생으로 올해 43세다. 그가 밝힌 창업 이력은 원저우 출신 민영기업인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3세 때, 중학교 졸업식을 15일 앞두고 자퇴를 해야 했다. 가족 생계를 책임지던 부친이 공사판에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밑천없이 손쉽게 창업한 것이 구두수선이다.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는데 길거리에 앉아 구두수선을 하는 것이 소년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내가 벌지 않으면 온 가족이 굶어죽는다는 생각에 망치에 손가락을 다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을 다잡고 구두수선에 전력을 다했다. 차츰 입소문이 나면서 멀리서도 구두수선을 맡기는 단골손님까지 생겼다. 3년 동안 구두수선을 하면서 그는 장사밑천을 조금 모았고 ‘신용만이 살길’이라는 상도를 터득했다.

그때 원저우 근교에 있는 고향 마을에서 저압변압기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50㎢ 내 1000여 개의 공장이 생겼고 단골손님에게서 정보를 입수한 그는 전기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부친은 아들이 하루 평균 20위안(우리돈 2400원) 벌이를 해오던 구두수선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친구 3명과 동업으로 ‘앞에는 판매대, 뒤에는 공장’ 형태의 변압기 구멍가게를 냈다. 84년, 그가 21세 때였다. 어린 마음에도 품질이 최고라는 생각에 상하이에 가서 퇴직 기술자들을 ‘모셔왔다’. 경리담당도 국영기업에서 30년 동안 일하다 퇴직한 전문가를 싸게 모셨다. 돈이 없어 공장에서 솥을 걸어놓고 밥을 해먹고 잠을 잤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원저우에서 만든 저압변압기가 불량품이 많아 사고가 잦아지자 89년 중앙정부에서 합동단속반이 뜬 것이다. 단속반이 난 회장의 공장으로 들이닥쳤을 때 단속반은 제대로 된 생산허가증과 자신의 브랜드를 가지고 자체 품질검사를 철저하게 하는 공장을 처음 발견한 것이다. 이후 원저우시는 난 회장 공장을 중점 지원 대상 기업으로 선정했고, 그는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는 공산당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당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민간인이지만 1993년 자발적으로 회사 내 당조직을 만들었다. 기업의 핵심은 사람이고 사람의 소질을 계발하는 데는 당의 사상정치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원저우시에서 국장을 지내다 퇴직한 전직 공무원을 초대 당지부 서기로 모셨다. 회사 당서기는 ‘민영기업이 열심히 돈을 벌어 일자리를 마련하고 세금을 내면 이것도 공산당을 위해 좋은 일’이라는 이론적 배경을 찾아내고 직원들의 정신교육을 책임졌다.

난춘후이 회장은 전인대 대표(국회의원), 중국 10대 청년, 중국 향진기업 10대 유명인사 등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기업 외의 일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정타이그룹에는 그동안 후진타오 주석과 장쩌민 전 주석 등 공산당 고위 인사들이 대부분 찾았을 정도로 원저우를 대표하는 기업이 됐다.

정타이그룹은 지난해 매출액은 150억 위안으로 변압기 생산으로서는 중국 1위, 세계 3위다. 중국 500대 민영기업 가운데 4위다. 외국을 포함해 중국 전역에 2000여 개의 판매 법인을 두고 있다. 근로자는 1만5000여 명이며 원저우 본사를 포함해 항저우 등 9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난춘후이 회장은 “유럽의 다국적 기업인 ABB, 독일 지멘스와 협력·경쟁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며 “앞으로 기술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말했다.

<원저우(중국 저장성)/홍인표 특파원 iph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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