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고교생 100만 명 참여 격렬한 시위… 과거 독재정권의 불평등 교육법 곪아터져
지난 5월부터 한 달여 동안 칠레 전역을 뒤흔들고 있는 고교생 시위는 세계화에 우등생인 나라일수록 교육 양극화의 부작용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던진다. 학교간 빈부 격차에 분노하며 최대 100만 명을 웃도는 고교생들이 물대포와 최루탄으로 무장한 진압경찰을 상대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대학입시 위주 교육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자립형 사립고나 특목고 등을 도입, 부모들의 수입이 학교의 수준 및 학생들의 장래를 좌우하는 한국적 상황에도 남의 일만은 아니다.
지난 봄 프랑스 학생시위가 국가가 제공하는 고등교육과정을 마치고도 사회에 진출하기 어려운 젊은이들의 절망이 표출된 것이라면 칠레 학생시위는 어른들이 구축해놓은 교육시스템이 학교간 양극화로 귀착된 데서 비롯됐다. 두 경우 모두 학생들은 물론 국민적 개혁 요구에 양국 정부가 무릎을 꿇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동시에 자본의 논리가 교육 현장에 스며들면서 기회의 평등이 붕괴될 때 교육서비스의 수요자인 학생들의 분노와 좌절이 한 사회를 뒤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점도 입증했다. 칠레의 경우에는 여기에 17년간 ‘제왕적 통치’를 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개발독재정권이 16년 전에 발효시킨 교육법이 뒤늦게 도마에 올랐다는 점에서 과거청산의 의미도 갖는다.
경찰청장 경질사태까지 벌어져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몇몇 고등학교에서 점거 농성이 벌어지면서 시작된 시위 학생들의 당초 요구는 소박했다. 대중교통수단 이용시 학생할인요금과 대학진학을 위해 치러야 하는 졸업시험 수험료 40달러(약 3만8000원)를 면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물론, 교사들과 노동운동단체 및 일반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교통수단 무료 이용, 학교간 빈부격차 해소, 교육시설 확충 등으로 요구가 확대됐다. 그 핵심에 피고름처럼 엉긴 ‘피노체트 교육법(LOCE)’에 대한 불만이 놓여 있다.
지난 6월 5일 하루의 시위에서만 경찰은 376명을 체포했고 35명이 다쳤으며 100여 개의 학교가 점거됐다. 경찰이 시위학생과 취재기자들을 폭행해 피노체트 시절의 악몽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정부는 민심이반을 우려, 경찰청장을 황급히 경질하기도 했다. 지난 3월 출범한 온건 좌파 미첼 바첼렛 정부는 곧이어 학생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연간 1억3500만 달러(882억 원)의 신규예산을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핵심 요구사항이던 무료 통학은 3억6000만 달러의 추가예산이 필요하다면서 수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상당수 학생들이 정부의 미지근한 타협안에 동의하지 않고 있어 사태가 완전히 진정되기까지는 당분간 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빈곤층 양질의 교육 기회 박탈
이번 시위로 남미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개혁 우등생으로 평가받던 칠레의 국가적 이미지는 추락됐다. 우리나라와 미국 등과 자유무역협정(FTA)를 맺는 등 경제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했던 칠레가 교육개혁만은 구시대의 틀을 유지해왔음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인구 1600만 명인 칠레는 2004년 이후 6%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주요 수출품 가운데 하나인 구리의 국제가격이 3년째 상종가를 치면서 향후 경제전망도 밝은 상황이다.
칠레 광공업공사 콜데코가 올해 구리수출로 벌어들일 수입은 11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바첼렛 정부는 달러화 약세로 인해 칠레산 과일과 포도주의 수출이 줄어드는 것을 상쇄하기 위해 구리수입을 투자할 방침이다. 학생들은 “어른들이여, 우리가 (국가적)미래의 일부라면 현재의 일부이기도 해야 한다”면서 구리수입의 일부를 헐어 고등학교에 투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공한 국가’ 칠레의 교육제도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불만의 씨앗은 피노체트 정권 말기에 뿌려졌다. 피노체트가 1990년 3월 퇴임 하루 전에 발효시킨 현 교육법(LOCE)은 지역간 빈부격차를 무시하고 초·중등 교육 재정을 지방자치단체에 일임함에 따라 부자 학교와 가난한 학교 간의 양극화를 조장했다. 여기에 정부 보조금을 일부 받되 전통적으로 공립학교에 적용됐던 국가적 방침에서 자유로운 반(半)자립형사립고(suvencionado·수벤치오나도)의 설립을 허용했다. 수벤치오나도는 정부보조금을 일부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학교 스스로 교과과정을 운영하고 학생과 교사의 선발, 교육비 책정에서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자립형사립고와 비슷하다. 수벤치오나도는 역시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도 지역별, 계층별 철학과 이념에 따라 설립돼 교육자치 권한을 부여받은 미국식 ‘특목고(charter school)’를 벤치마킹한 학교이기도 하다.
칠레 신문 ‘산티아고 타임스’가 교육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분석한 ‘피노체트 교육법’의 문제는 크게 3가지다. 우선 공교육에도 수익창출 개념을 적용, 적자를 내는 학교에는 지원을 줄였다. 두 번째로 학교마다 건실한 교과과정보다는 수익에만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결국 교육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수벤치오나도에 독자적인 학생 선발권을 부여, 수업능력이 떨어지거나 가난한 학생들은 질 낮은 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게 했다. 한마디로 학교는 물론 학생들에게까지 적자생존의 엄혹한 원칙을 강요한 셈이다.
개발독재시대에 만들어진 LOCE가 지금까지 존치된 것은 경제성장과 함께 돈만 있으면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교육부 장관을 지낸 리카르도 라고스 전 대통령은 “1990년대 초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LOCE를 개혁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보수적인 정당들의 반발로 무산됐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건 양극화 해소를 위한 두 가지 정책적 수단은 사회복지망 확충과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이다. 특히 교육제도가 불평등한 구조로 왜곡될 경우 부와 가난의 대물림 현상은 고착될 수밖에 없다. ‘무늬만 고교 평준화’일 뿐 자녀들을 명문고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한 평에 4000만 원에 달하는 아파트 값을 감수하는 부모들과 그러지 못하는 부모간에 괴리감이 커지고 있는 우리가 지구 반대편 칠레의 고교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오게 된 원인을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다행히 바첼렛 대통령은 물론 여·야 정치인들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LOCE의 개혁필요성에 공감을 표하고 있어 개선의 여지는 남아 있다. 칠레가 교육현장에까지 깊게 드리워진 ‘피노체트의 그늘’과 ‘자본의 논리’라는 겹사슬에서 벗어날지 주목된다. 균등한 교육이 제공되지 않을 경우 ‘학생들의 반란’은 어느 나라에서건 현실화할 수 있다.
<국제부/김진호 기자 j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