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구긴 노 대통령 ‘사학법 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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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청 갈등 표출시킨 ‘대승적 양보’ 권고… “정국주도권 카드가 부메랑되어 돌아온 꼴”

노무현 대통령이 4월 29일 청와대 관저에서 열린우리당 김한길·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를 안내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4월 29일 청와대 관저에서 열린우리당 김한길·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를 안내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속내는 뭘까?
노 대통령이 중요한 정치적 행위와 입장표명이 있을 때면 언제나 불거지는 의문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4월 29일 여야 원내대표들과 조찬 회동에서 “정국에 대한 포괄적인 책임은 여당이 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학법 재개정과 관련해 대해 열린우리당에 '대승적 양보'를 주문한 것이다.

이 주문에 대한 열린우리당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김원기 국회의장이 3·30 부동산대책 후속법안 3개를 포함한 4개의 법안의 국회 본회의 직권상정을 예고했던 5월 2일 오전의 일이다.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와 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 두 사람은 임시국회 파행을 막기 위해 만났다. “사학법의 재개정 없이 국회 본회의 없다”며 초강경태도를 보여왔던 이 원내대표가 “사학법 재개정 시한을 보름 정도 연장하고 논의를 계속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이) 노 대통령의 말도 듣지 않는데 내 말을 듣겠느냐”는 게 김 원내대표의 대답이었다. 결국 민주노동당이 추가로 직권상정을 요구한 주민소환법 등을 포함 6개 법안은 여당과 다른 두 야당의 힘으로 처리됐다. 김 원내대표의 발언은 ‘협상용 수사’일 수도 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노 대통령을 ‘무시’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단지 열린우리당의 반발 분위기를 전달하는 수준을 넘는 것이었다.

한편 한나라당의 시선도 미묘했다. 6개 법안이 통과된 직후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재오 원내대표는 “기분이 묘하다” “느낌이 아주 안 좋다”고 술회했다. 국회의원회관에 돌아온 임인배 의원도 “이번은 한나라당의 전략 문제라기보다는…”이라고 말을 흐리면서 “무엇엔가 홀린 기분이다”는 말을 여러 차례 독백처럼 뱉어냈다. 노 대통령의 제안에 복선이 깔려 있다는 의구심을 드러낸 것이다.

한나라당 “느낌이 아주 안 좋다”

사실 한나라당은 이날 오전 국회 본회의가 개회되기 전까지 “노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이라며 “열린우리당은 집권여당을 포기했느냐”고 비난했지만 여유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경북의 ㄱ 의원이 의원회관 자신의 방에서 열린우리당 ㅇ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ㄱ 의원은 “지금 뭐 하고 있어. 국회본회의장에서 ‘농성을 막기 위한 농성’ 중인가”라며 농담을 던지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러나 막상 민생법안 처리를 한 뒤 열린우리당의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됐다. 최재천 의원은 “노 대통령이 ‘국회는 다수결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 것을 상기해야 한다”면서 “노 대통령의 최대관심은 국방·사법개혁과 부동산 가격안정”이라고 강조했다. 김부겸 의원도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 3·30조치의 법제화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민생 위주의 국정운영에 대한 충정을 이해한다는 투다.

‘대승적 양보’를 주문할 당시와는 180도 다른 것이다. 노 대통령의 요청이 있기 하루 전인 4월 28일, 당·정·청의 정국 현안관련 모임이 있었다. 그 결과는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에 의해 노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노 대통령은 그저 열린우리당의 비판 대상일 뿐이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지난해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제의했던 대연정이 연상된다” “정동영 의장을 버리는 카드로 쓰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 아니냐” “사학법은 열린우리당 정체성을 상징하는 심장이고 두뇌다” “독선적 리더십은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며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렇다면 이처럼 정국을 뒤흔든, 진정한 노 대통령의 속마음은 무엇일까? 특히 5·31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민감한 시기에 열린우리당의 정체성과 연관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사학법 문제를 왜 건드렸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 ‘대승적 양보’에서 비롯된 정치적 손익계산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5월 2일 국회의장 직권으로 상정된 3·30부동산대책 후속법안 등이 표결처리되는 가운데 한나라당 진수희(우측에서 두번째) 의원과 열린우리당 여성의원들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5월 2일 국회의장 직권으로 상정된 3·30부동산대책 후속법안 등이 표결처리되는 가운데 한나라당 진수희(우측에서 두번째) 의원과 열린우리당 여성의원들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실리와 명분 챙겨

일단 민생법안 처리로 주도권을 장악한 열린우리당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겼다. 정봉주 의원은 “민생법안 처리라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전혀 훼손하지 않은 것은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여기다가 5·31 지방선거를 한 달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의 지지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부과적 이득도 얻었다.

노 대통령의 처지는 다르다. 특히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연상시키는 ‘대승적 양보’ 제안,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거절로 당·청관계는 매우 미묘한 상황으로 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일차적 책임과 부담은 노 대통령에게 귀결된다. 노 대통령이 제기하고 초래한 문제기 때문이다.

이런 막대한 상처를 감당하면서 했던 제안의 `시의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 참여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을 갖는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왔기 때문. 이는 곧 지방선거 이후의 국정운영은 물론 차기 여권의 대선 구도를 염두에 둔 포석일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방선거 후에 각종 정치 현안과 관련된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한 ‘정치적 카드’ 아니겠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특히 이번 지방선거는 여당의 패배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정치권에선 지방선거 후 정계개편이 불가피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열린우리당 노웅래 의원은 “열린우리당이 선전하면 제3의 방안을 모색할 여지가 있지만 패배한다면 곧 개헌론과 맞물린 대대적인 정계개편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김부겸 의원은 “이젠 정계개편을 노 대통령이 중심에 서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라는 의심에 대한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 점은 한나라당 일부의원들도 인정하고 있다. 공성진 의원은 “노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어느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고 독선적이고 즉흥적으로 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면서 “노대통령의 확실한 정치적 의도나 증거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노 대통령의 입지는 현저히 좁아졌다. 여기다가 당·청 갈등이 봉합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정동영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가 앞장 서서 노 대통령의 입장에 반기를 들었다. 이런 분석을 하는 사람들은 “노 대통령이 지방선거 후 예상되는 레임덕을 막기 위해 던진 ‘카드’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 꼴”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승부사 기질이 넘치는 노 대통령이 장고 끝에 악수를 둔 것인지, 아니며 장기적 포석인지는 지방선거 결과와 그 이후의 정국흐름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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