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가스관 ‘유럽 지배’ 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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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회사 ‘가즈프롬’ 에너지 공급권 무기로 정치·외교에까지 영향력 확대

지난해 말 러시아 바바예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이 가스관 연결작업을 하고 있다. 이 공사는 러시아가 발트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서유럽으로 천연가스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 말 러시아 바바예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이 가스관 연결작업을 하고 있다. 이 공사는 러시아가 발트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서유럽으로 천연가스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고유가 바람과 함께 세계 각국이 에너지 확보에 비상이 걸린 요즘 러시아의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이 세계를 위협하는 공룡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천연가스 생산량의 20%를 점유하고 있는 가즈프롬은 에너지 공급권을 무기로 비즈니스뿐 아니라 정치·외교 분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가즈프롬은 올해초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하는 위력 시위를 벌여 우크라이나를 지나 유럽으로 연결되는 파이프에 에너지 대부분을 의존하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에너지전쟁 시대로 불리는 요즘 전체 천연가스 소비량의 25% 이상을 가즈프롬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유럽은 사실상 가즈프롬에 멱살을 잡힌 형국이다.

유럽은 지금 가즈프롬의 협박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영국의 가스공급 업체 센트리카를 인수하려는 가즈프롬의 움직임에 영국 정부가 제동을 걸려 하자 가즈프롬이 “유럽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하겠다”며 위협을 가한 것이다.
가즈프롬이 센트리카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유럽 각국의 소매기업을 통해 천연가스를 직접 판매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에너지 차원을 넘어 안보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관계법령을 개정해가며 이를 저지하려 했다. 민간기업간 인수 합병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영국법으로 금지돼 있지만 국가안보에 관한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는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고 있다.

유럽 가스공급 중단 노골적 협박

그러자 가즈프롬의 알렉세이 밀러 회장은 4월 19일 “유럽시장에서 정당한 경제활동을 제한하려는 영국정부의 시도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가즈프롬이 미국과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유럽에 가스공급을 끊고 다른 시장에 가스를 팔겠다는 노골적 협박이었다.

가즈프롬 본사 전경.

가즈프롬 본사 전경.

유럽 각국의 라시아에 대한 천연가스 의존도를 살펴보면 러시아가 이처럼 고압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독일은 국내에서 소비하는 천연가스의 44%를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각각 29%와 26%를 의존하고 있으며 핀란드는 아예 100%를 러시아에서 공급받는다. 그외 동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50% 이상을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러시아가 당장 유럽에 가스공급을 중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유럽은 가즈프롬의 위력을 또 한번 절감해야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가즈프롬의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독점에 우려를 표시하며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를 이처럼 긴장시키고 있는 가즈프롬은 도대체 어떤 기업인가. 1993년 설립된 가즈프롬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생산령의 90%를 담당하고 있으며 세계 27개국에 가스를 수출해 러시아 국내총생산의 8%를 차지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최근 고유가 행진으로 가즈프롬의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급상승하고 있다. 가즈프롬의 주식은 지난 26일 모스크바 시장에서 8.27%나 올라 시가 총액이 2660억 달러(약 257조 원)까지 치솟았다. 이날 하루에만 기업가치가 200억 달러 이상 오르는 기록을 세운 가즈프롬은 월마트·도요타 등을 제치고 세계 4대 기업으로 부상했다.

공룡 같은 몸집을 가진 이 거대기업의 지분은 50% 이상이 러시아 정부 소유다. 또한 밀러 회장이 러시아 에너지부 차관 출신이며 비상임이사회 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현직 부총리 신분이다. 이사회에도 게르만 그레프 통상장관을 비롯한 정부측 인사들이 다수 참여해 가즈프롬은 사실상 국가 조직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경영정책은 러시아의 국가적 에너지 정책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가즈프롬의 급성장은 에너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러시아 정부의 장기적이고 치밀한 준비작업에 의한 것이다.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구 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됐던 사기업들을 다시 장악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중 에너지 분야가 가장 먼저 재국유화 대상이 됐다. 푸틴 대통령이 민간 석유기업 유코스를 세무조사하고 소유주이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구속한 것도 결국 이 회사를 국유화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에너지산업 국유화로 통제

현재 러시아에서는 가즈프롬 외에도 전체 석유산업의 30% 이상이 사실상 국유화됐다. 또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의 모든 석유·천연가스 회사가 가즈프롬과 현재 러시아 5위의 석유업체인 로스네프티로 통합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이와 같은 국유화 작업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낙후한 국가 기간산업을 단시일에 육성해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시장경제 원칙에 반하는 국유화는 장기적으로 경영의 효율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러시아가 에너지 산업을 통제하려는 이유는 에너지를 통해 과거 구 소련이 누렸던 영화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과거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동유럽 국가에 미군이 주둔하고 이들이 친유럽적 정책을 추구하자 러시아가 위기감을 느끼는 탓이기도 하다.

지난달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국제산업박람회에서 한 인부가 가즈프롬의 부스에 걸린 회사 로고를 손질하고 있다.

지난달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국제산업박람회에서 한 인부가 가즈프롬의 부스에 걸린 회사 로고를 손질하고 있다.

고유가와 인도·중국 등 신흥 경제대국의 에너지 수요 증가에 따라 에너지 안보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과거처럼 동유럽 국가들을 실질적 지배하에 두고 유럽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에너지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다. 가즈프롬의 급속한 성장과 러시아의 에너지 산업 통제는 과거 냉전시대에 강대국들이 이념과 핵무기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과는 달리 유전과 가스관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에너지를 앞세운 러시아의 공세가 강화되자 유럽에서는 핵에너지 개발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유출사고 이후 유럽국들은 원전개발을 중단했으나 최근 고유가에 따른 에너지 확보의 어려움과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다시 원전개발을 고려하고 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올해 초 신형 원자력 발전소 시험건설을 국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착수하겠다고 밝혔으며 2012년까지 제3세대 원자로 1기를 건설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원자력 발전에 반대해온 독일에서도 2020년까지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기하기로 한 결정을 백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 1987년 국민투표를 통해 원자력 발전소를 폐기한 이탈리아도 원전 재개를 검토중이며 2010년까지 기존의 원자로 10기를 없애기로 했던 스웨덴도 이 결정을 재고하기로 했다.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불가리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들도 원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제부/유신모 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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