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30년 만에 혁명이념 네팔·인도서 맹위… 사회적 불평등이 마오이즘 부활 부추겨
'마오의 유령이 남아시아를 떠돌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마오쩌둥(毛澤東)이 사후 30년 만에 곳곳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아시아의 농촌 지역에서 마오는 지금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중국에서 거대한 마오 동상이 연이어 들어서는 등 그에 대한 숭배가 되살아난다고 하지만 그것은 건국의 아버지로서 존경의 뜻을 담은 측면이 강하지 그의 혁명과 이념이 본격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혁명과 이념이 맹위를 떨치는 곳은 따로 있다. 인접국 네팔과 인도다.
이들 국가의 일부 지역에서 마오주의 반군은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갸넨드라 국왕이 통치하는 네팔의 경우 마오반군은 전 국토의 40%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1만5000명 가량 되는 이들은 이 지역에서 과세·교육·의료 등 정부 권한을 행사한다. 20일 가까이 군대와 시위대 사이의 충돌로 이어져온 국왕 퇴진 요구 시위와 총파업도 사실 이들 작품이다. 마오반군은 1996년 ‘소작농이 세상의 주인 되는’ 네팔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봉기한 이래 게릴라전 등을 통해 꾸준히 왕정을 위협해왔다. 사실 왕정 타도 구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지난해 2월 갸넨드라 국왕이 반군토벌을 명분으로 내각을 해산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반향을 얻기 시작했다. 반군 지도자 프라찬드라는 “네팔 인민들이 바라는 민주주의와 평화는 현 국왕의 퇴진과 다당제 민주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이 옹호하는 다당제 민주주의는 궁극적인 종착점이라기보다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과정이다.
인도 13개주서 마오반군 영향력
이보다 먼저 마오주의 운동을 부활시킨 것은 인도다. 마오쩌둥 생존시인 1968년 인도 북동부 낙살바리에서 무장봉기한 이후 인도 마오 반군은 전 세계 마오주의 운동의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다. 1980년대 비하르주에 설립된 마오주의공산주의자센터(MCC)는 네팔 반군을 비롯, 방글라데시·스리랑카의 반군도 지원해왔다. 낙살바리의 이름을 따서 인도 마오주의자들을 ‘낙살라이트’라고도 한다.
사실 경제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 때문에 시장에서 주목받는 인도에 마오 반군이 존재하는 것은 서양에서도 관심거리다. ‘뉴욕타임스’(4월14일), ‘이코노미스트’(4월21일) 등이 이 현상을 신기하면서도 다소 우려스럽다는 시선으로 다뤘다. ‘이코노미스트’는 인도 중동부 지역이 상당 부분 `적화(赤化)됐다’고 표현했다. 2만여 명의 조직원을 가진 인도 마오 반군은 인도 중동부를 중심으로 전체 28개 주 중 13개 주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차티스가르주처럼 숲이 울창한 지역일수록 세력이 공고하다. 이런 지역일수록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약한데다 정부의 개발정책 때문에 땅을 잃을 처지여서 이들에게 동조한다.
인도 마오 반군의 전적은 화려하다. 이들은 지난 2월 지뢰를 매설해 군인과 민간인 등 30여 명을 살해하는가 하면 4월에는 경찰에 게릴라공격을 가해 10명을 사살했다. 국유 광산회사를 습격해 19t의 폭약을 훔치기도 하고 지난해엔 비하르주의 교도소를 습격해 300명을 탈주시켰다. 차티스가르주와 오리사주에서 반군은 광산과 제철소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방해하고 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자경단이 조직되기도 했으나 반군과 자경단의 충돌로 지난해에만 1000여 명이 숨졌다.
마오 사후 마오주의는 1970년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에 의해, 1980년대에 남미의 페루에서 부활했다. 특히 철학교수 출신의 페루인 아비마엘 구스만이 만든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는 마오주의의 영역을 전세계로 넓혔다. 1992년 구스만이 체포되며 사실상 와해됐고 이후 마오주의의 거점은 다시 아시아로 넘어왔다.
인도·네팔 마오주의자들이 표방하는 강령도 자국 현실에 맞게 변용한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다. 현 정부기구를 무너뜨리고 다당제 민주주의를 구축한 뒤 소작농 계층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체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이 ‘다름’을 용납하지 않으며 가차없이 민간인을 사살하는데도 빈농들의 지지를 꾸준히 얻는 것은 이 지역의 뿌리 깊은 카스트 제도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도 한몫했다. 세계화의 뒤안길, 피폐한 현실에 절망한 농민들에게 마오 반군의 게릴라 운동은 그나마 가장 큰 희망이었던 것이다. 혁명에 농민을 동원했던 마오쩌둥의 경험은 이들 반군에게도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마오주의자들을 무시하던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는 최근 마오이즘이 인도 내 치안 문제 중 가장 큰 문제라고 시인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4월 19일 사설에서 ▲강한 물리력에 의한 소탕 ▲경제 개혁을 통한 빈곤 퇴치 ▲뿌리깊은 사회·정치적 차별 폐지 등 3가지 해결법이 동시에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평등이 마오이즘 부상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불평등 문제를 그대로 둘 경우 마오이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티벳에서는 최대규모 동상 건립
마오쩌둥이 좀 다른 의미에서 맹위를 떨치는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바로 1951년 마오가 주도적으로 복속시켰던 티베트다. 티베트에서는 그의 30주기를 맞아 사상 최대 규모의 동상이 건립되고 있다. 35t의 대형 화강암으로 조성되는 7m 높이의 이 동상은 티베트의 첫번째 마오 동상이자 중국 최대 규모가 된다. 건립 비용은 마오의 고향인 후난성 창사 시당국이 대며 오는 9월9일 마오의 사망 30주년이 되는 날을 맞아 공개된다.
티베트 지역의 중국 공산당 관계자는 “마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동상 건립을 원하는 주민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일부의 생각일 뿐 동상 건립을 바라보는 대부분 티베트인들의 마음은 쓰리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의 독립 움직임을 가혹하게 탄압해왔으며 달라이 라마의 망명 정부에서 보듯 티베트인들의 상처는 지금도 여전하다.
‘대륙의 딸’의 저자 장룽(張戎)은 마오 30주기를 맞아 마오쩌둥 평전(한국판 제목: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마오)을 내놓았다. 그가 10여 년의 자료 조사와 480여 명 인터뷰를 거쳐 내놓은 마오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인 이기주의와 무책임성이 세계관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고, 격변과 파괴에서 기쁨을 느끼는” 인물이다. 또한 농민·노동자를 존중하지도 연민을 느끼지도 않았으며 “중국 인민을 수십 년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평화시에 야기된 7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1세기의 마오주의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사정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자본주의가 위세를 떨치고 있던 1993년 난데없이 “마르크스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고 말했을 때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국제부/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