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스산맥 두 나라 팽팽한 원산지 주장… 뿌리 깊은 ‘앙숙 국가’ 갈등 고조
![[월드리포트]페루-칠레 자존심 건 ‘감자전쟁’](https://img.khan.co.kr/newsmaker/669/wor1-1.jpg)
퀴즈-다음에 설명하는 작물은 무엇일까.
유럽인들은 처음 이 작물을 본 뒤 관상용 정원 식물이라 생각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최음제라고 여겨 좋아하기도 했다. 땅속에 무성하게 매달려 자라는 열매와 빠른 생장 속도 때문에 ‘악마의 식물’로 불리면서 심한 배척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게으름뱅이들을 가리킬 때 ‘이것으로 된 피를 가졌다’고 말하며 미국에서는 ‘얼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정답은 감자다. 오늘날 밀, 쌀과 더불어 주식으로 애용되는 감자는 잉카인들의 주요식량으로 1570년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유럽에 소개된 뒤 전 세계에 퍼져서 오늘날 100여 개국에서 매년 3억t 가량 생산되며 밀, 쌀과 더불어 주식으로 자리잡았다.
![[월드리포트]페루-칠레 자존심 건 ‘감자전쟁’](https://img.khan.co.kr/newsmaker/669/wor1-2.jpg)
그렇다면 감자의 원산지는 어디인가. 요즘 감자를 놓고 안데스 산맥에 자리한 앙숙, 페루와 칠레가 뜨거운 공방을 벌이고 있다. 감자의 원산지는 페루에서부터 아르헨티나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잉카제국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페루는 감자의 원산지 역시 페루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페루의 자존심을 칠레가 건드렸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칠레의 한 농업대학 교수가 칠레 남부 칠로에 섬에서 자라는 감자 280개 품종을 칠레의 국가 재산으로 등록하겠다고 발표했다. 칠레 오스트럴 대학 농업과학대의 안드레스 콘트레라스 교수는 칠레의 감자를 국가 재산으로 등록하려는 이유에 대해 “이 감자품종들은 이 나라에서 자라고 발전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보호하고 싶다”고 말했다.
칠레 국가재산 등록 발표에 페루 발끈
이같은 칠레의 계획과 발언은 2009년부터 전 세계에서 벌어질 종자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콘트레라스 교수는 “우리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이 감자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돈을 요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감자가 칠레의 원산지라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칠레지역 감자품종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루는 ‘감자를 국가재산화하겠다’는 칠레의 계획이 “부적절하다”고 반박했다. 오스카르 마우르투아 페루 외무장관은 “감자가 페루 남부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어 왔으며, 때문에 우리나라의 문화적 유산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미국 농무부가 지원한 한 연구도 페루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미국 농무부의 지원을 받아 지구상에 존재하는 야생 및 재배용 감자 360종의 DNA를 분석한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데이비드 스푸너 박사도 연구결과에서 감자의 원산지는 7000년 전 페루의 농부들이 키운 감자 한 종에서 유래했다고 말했다. 그는 “재배용 감자의 원산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감자의 원산지는 페루 남부 한 곳뿐”이라고 말했다.
페루의회는 지난해 감자보호법안을 통과시켰고 현재 감자가 페루의 특산물이라는 국제 특허를 낼 계획이다. 페루는 감자문제를 유엔에 제소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감자의 원산지 및 상표권을 놓고 벌어진 페루와 칠레의 공방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두 나라는 안데스 산맥을 따라 마주하고 있지만 양국의 관계는 그리 원만치 않다. 양국은 영토, 영해, 수산물, 알코올음료 등을 놓고 과거에도 여러 차례 맞붙었으며 심지어 해커들마저도 양국 정부의 홈페이지를 해킹하기까지 했다.

오른쪽_양국의 갈등을 보여주는 페루의 한 광고. 포도송이로 라틴아메리카를 재현하면서, 칠레에 해당하는 부분을 포도알은 없이 황폐한 줄기만 남은 것으로 묘사했다.
왼쪽_포도를 증류해 만드는 피스코. 칠레와 페루는 모두 동일한 증류방식으로 피스코를 만들지만 당도는 약간 다르다.
비슷한 문화와 역사,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두 나라의 갈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페루와 칠레는 모두 스페인 정복 이후 19세기에 독립전쟁을 통해 근대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인종 구성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페루가 원주민이 54%, 원주민과 백인 간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34%로 이뤄진 ‘인디오의 나라’인 데 반해, 칠레는 스페인계 메스티소와 백인이 인구의 95%를 차지하고 인디언은 3%에 불과하다. 마추픽추를 중심으로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과 1200만 명에 달하는 백성을 거느렸던 ‘태양의 제국’의 후손인 페루인들로서는 자신들의 문명을 파괴한 백인들의 후손의 나라인 칠레가 거슬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약 150여 년 전 칠레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 이후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1879년~1883년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는 비옥한 광물자원이 매장된 남부 영토 상당 부분을 칠레에 뺏겼다. 이 지역은 두고두고 양국 간 갈등의 불씨가 됐다. 당시 볼리비아도 태평양과 접하고 있던 유일한 아리카 항구를 칠레에 넘겨줘야 했다. 칠레가 할양받은 지역은 초석과 인산질 비료의 원료인 구아노의 산지로 칠레는 이 지역의 광물자원을 바탕으로 경제 번영의 기반을 닦았다.
영토분쟁 불씨 경제·문화계로 확산
페루와 칠레의 관계는 여전히 냉랭하다. 1950년대 페루와 칠레는 영해문제로 대립하다가 조약을 맺고 화해했다. 그러다 지난해 1995년 페루-에콰도르 전쟁 때 칠레가 에콰도르에 무기를 공급한 것으로 드러나 양국의 관계는 악화됐다.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칠레 정부가 사과하지 않자 페루는 지난 5월 항의의 뜻으로 칠레와 자유무역협상 중단을 선언했으며 미주기구(OAS)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칠레 내무장관에 대한 지지를 거절했다.
지난해 11월에는 페루의회가 태평양의 어장 확보를 위해 칠레와의 해양 국경선을 다시 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안 제정을 추진했다. 그러자 칠레는 이 법안이 1950년대에 맺은 국경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양국의 외교 갈등은 최근 들어 경제계·문화계로도 확산되는 양상이다. 2002년 말 양국은 포도주로 만든 브랜디 ‘피스코’의 원산지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페루와 칠레 모두 피스코의 상표권을 주장하면서 각각 이를 입증할 증거가 있다고 나섰다. 페루가 피스코라는 단어 자체가 새를 뜻하는 잉카어로 1540년 이래 페루에서 제조되어왔다고 주장하자, 칠레는 경제적 관점에서 상표권 우위를 주장했다. 페루보다 피스코의 생산량은 물론이고 수출량도 3배 가량 많으며 피스코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 페루나 칠레 모두 스페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결책으로 양국의 합작을 제안했지만 칠레는 페루산 피스코의 수입을 1961년 이후 금지해왔으며 페루 역시 마찬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뿌리깊은 라틴아메리카의 앙숙, 페루와 칠레. 양국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인가?
<국제부/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