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로 관심 고조시켜 ‘메이저리그’란 상품 해외판로 확대 노리는 ‘세계화 상술’
![[월드리포트]미국의 ‘야구 지배’ 검은 속셈](https://img.khan.co.kr/newsmaker/667/wor1-1.jpg)
야구 시즌도 아닌 3월 한국은 온통 야구열기에 휩싸였다. 야구가 국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포츠임은 누구나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이번처럼 모든 국민의 열광적 성원을 받으며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은 한국 야구역사 100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달 초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국제야구대회가 처음 개막했을 때만 해도 많은 한국인들은 이런 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국이 메이저리거와 일본 프로야구 간판 스타들로 구성된 일본·멕시코·미국을 연파하자 야구 열기는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거리응원이 펼쳐지면서 분위기는 2002년 서울 월드컵 때로 돌아갔고 출전 선수들에게는 병역면제 혜택까지 주어졌다.
식을 줄 모르는 이같은 열광적 분위기 속에서도 의문점은 남는다. 갑자기 나타난 WBC는 도대체 어떤 성격의 대회이며 이 대회에서의 선전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WBC는 기존의 야구대회와 다르다. 그동안 야구 국가대항전은 아마추어 야구선수권대회와 올림픽, 그리고 친선 차원에서 벌어지는 평가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WBC는 미국 메이저리그를 포함해 일본 프로야구리그, 멕시칸리그 등 각국의 프로선수들이 모두 참가해 사실상 최강팀으로 구성된 국가대표 간의 대결이다.
대회 수익금도 메이저리그서 좌우
한국팀의 깜짝 놀랄 만한 선전이 반갑기는 하지만 WBC라는 대회의 성격과 개최 의도를 들여다보면 뒷맛이 개운치는 않다. 야구 월드컵이라고는 하지만 WBC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축구 월드컵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대회다. WBC를 사실상 주관하는 주최측은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메이저리그 선수노조다. 대회 방식과 개최 일정은 물론 대회에서 얻어지는 중계권료, 입장 수입 등 수익금도 모두 이들이 좌우한다. 올해가 1회라지만 2회 대회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열리게 될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메이저리그가 선수와 구단에 모두 매우 중요한 시기인 스프링캠프 훈련기임에도 이번 대회를 열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업적 목적 때문이다. 야구를 전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즐기는 ‘글로벌 스포츠’로 만든다는 것이 이번 대회를 통해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다.
야구는 축구나 농구처럼 전 세계에 보급된 보편적 스포츠 종목이 아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야구를 즐기는 나라는 북중미와 한국·일본 등 일부 지역에 한정돼 있다. 야구 세계화에 성공해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메이저리그는 역사적 배경이나 선수들의 경기력, 스포츠 산업으로서의 인프라 등에서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은 궁극적으로 메이저리그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야구세계화는 곧 메이저리그라는 상품을 전 세계가 사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야구가 세계화되면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쏟아져나오는 유망주들을 싼 값에 자국의 메이저리그에 공급할 수 있다. 또 메이저리거를 탄생시킨 국가들은 비싼 중계권료를 내고 경기를 중계하고 메이저리그 로고가 찍힌 상품까지 산다.
![[월드리포트]미국의 ‘야구 지배’ 검은 속셈](https://img.khan.co.kr/newsmaker/667/wor1-2.jpg)
지금 중남미 국가들은 메이저리그에 수많은 우수 선수들을 진출시키고 사실상 메이저리그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이 얻는 수익은 매우 미미하다. 한국과 일본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자국 선수가 생겨나면서 국내 리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해마다 간판 선수와 유망주들을 메이저리그에 뺏기고 있다.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의 메이저리그 진출로 시작된 아시아 야구 시장의 대미 종속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있는 형편이고 보면 박찬호나 노모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인지 메이저리그가 아시아에 진출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메이저리그 경기가 처음 중계된 것은 1995년 스포츠 전문케이블인 한국스포츠TV에서였다. 당시 한국스포츠TV는 미국 스포츠 전문방송 ESPN의 프로그램을 모두 사용하면서 ESPN에 연간 20만 달러 정도를 지불했다. 그러나 박찬호의 활약이 본격화되던 2000년 메이저리그 단독 중계권료는 4년간 3000만 달러로 껑충 뛰었고 현재는 연간 1000만 달러를 훨씬 넘는 액수를 메이저리그에 지불하고 있다.
야구가 세계화되면 이같은 현상은 세계 각국의 모든 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다. 미국이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원칙이 야구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외국 유망주들 싼 값에 공급 받아
메이저리그가 세계 정복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다. 당시 미프로농구 NBA가 드림팀을 만들어 올림픽에 참가한 뒤 NBA 인기가 세계적으로 치솟으면서 NBA는 글로벌 마케팅에 성공했다. 이에 자극받은 메이저리그는 세계 각국에 야구 선교단을 파견해 야구보급에 열을 올렸고 이제 조심스럽게 뿌린 씨를 거두려하는 단계에 있다.
그러나 야구가 축구처럼 세계적 스포츠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야구는 규칙·시설·장비가 매우 복잡해 단기간에 보급하기 어려운 스포츠라는 단점이 있다. 또 경기 속성상 축구처럼 단판 승부의 토너먼트로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기 대회를 통해 실력을 가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같은 단점을 메우기 위해 이번 대회에서는 참가하는 선수들의 국적 자격을 대폭 완화했다. 예를 들어 미국 시민권을 가진 선수라도 본인 또는 부모가 특정 국가 출신일 경우 국적을 바꿔 해당 국가 선수로 출전할 수도 있었다. 또 특정 투수에게 의존해 경기를 이길 수 있는 폐단을 막기 위해 투수들의 투구수를 제한하는 등의 새로운 규칙도 적용했다. 이같은 조치는 모두 많은 국가의 참여를 유도해 흥행에 성공하려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아이디어였다.
메이저리그에 유망주를 뺏기기 시작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98년 해외 진출 선수가 국내로 복귀할 경우 2년간 국내 프로팀과의 계약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까지 만들어 선수 보호에 고심하고 있다. 이 규약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 KBO가 해외 활동 선수들을 모두 불러들여 이번 대회에 참가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한국 야구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또 돌풍을 일으키며 대회 흥행에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WBC가 지금과 같은 구조 속에서 계속 열린다면 한국팀이 투혼을 발휘한 결과가 메이저리그의 상술에 이용되고 언젠가 한국 프로야구의 근간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어올 수도 있다.
<국제부/유신모 기자 simo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