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대통령 당선자 모랄레스 정상회담서 스웨터 차림 고집
어떤 옷을 어떻게 입느냐 하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영역에 속한다. 옷을 고른 사람의 생각과 성향이 옷차림에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옷차림이 그게 뭐냐?”는 타박을 받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도 자신의 생각과 주관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옷을 고르는 것은 일반인의 경우다. 공인이 되고 나면 자기 만족을 위해 기분에 따라 옷을 골라 입을 수 없다. 공인의 의상 선택은 자신보다는 타인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경우가 더 많다. 이 때문에 정치인의 의상 선택은 때로 강렬한 메시지 전달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요즘 국제 외교무대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이슈는 단연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당선자의 패션이다. 지난해 12월 볼리비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모랄레스는 22일 취임식을 하고 남미 최초의 인디오(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됐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을 방문하고 남미 최대의 반미 지도자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만났다.
이후 모랄레스는 스페인·프랑스·남아프리카공화국·중국을 방문하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향하는 등 바쁜 외교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런데 모랄레스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넥타이를 맨 정장이 아닌 스웨터 차림을 고집하고 있다. 그가 입고 나타나는 스웨터는 흰색·붉은색·파란색·녹색 등 원색의 줄무늬가 요란하게 들어간 것이다.
의상 통해 자신의 출신 과시
아직 정식으로 취임하지 않은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이긴 하지만 다른 나라를 방문해 그 나라 최고지도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정장을 입지 않는 것은 외교 관례상 찾아보기 힘든 파격이다. 모랄레스는 프랑스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만날 때와 중국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만날 때 스웨터 위에 가죽 코트를 입기도 했고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을 만날 때는 반팔 드레스셔츠를 입기도 했지만 한사코 넥타이 정장만은 입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랄레스의 의상 선택은 각국의 비난을 받았다. 멕시코의 한 일간신문은 모랄레스가 각국 정상과 악수하는 사진을 나열해 놓고 ‘부조화의 옷차림’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문명 국가들의 어리석은 자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자국 볼리비아의 한 언론은 서방 선진국들이 볼리비아의 채무 삭감을 논의하는 것을 빗대 ‘볼리비아의 빚만 탕감해 줄 것이 아니라 스웨터도 한 벌 사줘야 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토스타인 베블렌은 자신의 유명한 ‘유한(有閑) 계급론’에서 의상이 과시적 유한의 한 수단임을 지적했다. 사람들은 의상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상류층은 비싸고 비실용적인 옷을 입어 자신이 상류층임을 과시하고 여성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옷을 입음으로써 노동의 의무를 면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서구 중심의 드레스코드에 대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랄레스는 의상을 통해 자신의 출신을 과시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랄레스가 입는 스웨터는 남미 안데스 산악지대에서 자라는 낙타의 일종인 알파카의 털로 만든 것이다. 알파카 스웨터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주요 수출품이기도 하다. 또 그가 입는 가죽 코트도 볼리비아 특산물이다. 모랄레스는 대통령이 되기 전 코카나무를 재배하는 농민이었고 그 이전에는 알파카를 사육하는 목동이었다. 외신들은 남미 원주민 아이마라족 출신인 모랄레스가 스웨터를 고집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지지 기반인 원주민에게 자신이 원주민 출신임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지금 전 세계에서 모랄레스를 제외하고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국가 지도자가 국제적 코드인 넥타이 정장이 아닌 특수 의상을 입고 외교무대에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혁명으로 집권해 47년째 쿠바를 통치하고 있는 카스트로 의장은 혁명가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지금도 군복을 즐겨 입는다. 카스트로는 교황을 만날 때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넥타이 정장을 하지만 국내 의회에서 연설을 할 때나 외국 사절을 접견할 때는 항상 군복을 입는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경우 최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날 때 입었던 방한복이 화제가 됐다. 외국 지도자를 만나는 자리에 큰 주머니가 달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방한복을 굳이 입고 나온 이유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복장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인민들에게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한 연출이며 중국에게는 북한의 사정이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과거 냉전 시대 중국의 국가 지도자들은 모두 쑨원(孫文)이 고안했다는 중산복을 입었다. 활동성을 높이고 남녀노소가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중산복은 모든 인민이 평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공산당 간부들의 공식 의상이 됐다. 당시 중국에서 양복은 주자파(走資派)나 입는 것이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할 때 중산복을 입은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저우언라이(朱恩來)는 지금도 사진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국지도자의 중산복은 혁명 1세대인 덩샤오핑(鄧少平) 이후 사라졌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지도자들은 세련된 양복차림으로 변했다.
하지만 지금도 정치인들이 외교무대에서 의상을 수단으로 삼아 무언의 의사표시를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1998년 일본을 방문했던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 주석은 일왕 주재 만찬에 중산복을 입고 나타나 화제를 뿌렸다. 당시 장쩌민의 의상 선택은 일본의 과거사 인식 문제에 강경하게 항의하는 의미였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외교무대에서 자신의 상의 왼쪽에 달고 나오는 다양한 브로치로 메시지를 전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모랄레스의 스웨터에는 자신이 원주민 출신임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 외에 정치적 의미도 담겨 있다. 서구 중심의 드레스 코드를 배격함으로써 미국의 정책과 신자유주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항하겠다는 선전포고를 전달하는 것이다. 실제로 남미에서는 모랄레스의 당선으로 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로 이어지는 강력한 반미 동맹이 구축되었다. 모랄레스의 패션을 단순히 흥밋거리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알파카 스웨터를 통해 강경한 반미 외교노선을 추구할 것이라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국제부/유신모 기자 simo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