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천연자원 수출가격 대폭 올려 주변국 지배력 강화 노려

최근 에너지 공급을 무기로 구 소련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에너지 외교’를 통해 구 소련의 영화를 다시 구현하려는 러시아의 야심이 구체화되고 있다.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근 행보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단연 에너지 정책이다. 러시아는 에너지 공급을 무기로 주변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서방의 유명인사들을 러시아 에너지 회사의 ‘얼굴마담’격으로 영입하려는 헤드헌팅 작업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러시아는 발트해 연안 국가를 포함한 동유럽 지역은 물론 서유럽과 미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정책은 러시아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천연자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러시아는 하루 800만 배럴의 원유를 퍼올리는 세계 2위의 원유생산국이다. 이로 인해 얻어지는 수입은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40%에 달한다. 러시아는 원유뿐 아니라 천연가스도 생산과 수출에서 모두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친러시아 국가 공급가격은 동결
러시아는 최근 발트해 연안 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과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등에 대한 천연가스 수출가격을 내년부터 400% 인상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리투아니아에는 석유수출을 중단하기로 했다. 에너지 자원을 지배력 강화의 무기로 삼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알렉세이 쿠드린 러시아 재무장관은 “그동안 러시아는 주변국에 대한 원조 차원에서 싼 가격으로 에너지를 제공해왔다”면서 “이제부터는 에너지 정책이 국익을 우선으로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쿠드린 장관의 말처럼 비즈니스 차원에서 이같은 결정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벨로루시와 아르메니아처럼 친러시아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국가들은 내년에도 여전히 같은 가격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앞서 언급한 5개국은 모두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즐어들고 있는 친서방 국가다.
러시아의 이같은 조치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석유회사 유코스의 회장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제거한 것을 계기로 석유산업 국영화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왔다. 호도르코프스키의 구속은 에너지 자원을 외교무기로 삼기 위한 사전 포석의 시발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에 따라 지난 90년대 민영화됐던 러시아의 석유산업은 정부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다. 현재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30%는 국가가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의 발표에 가장 먼저 반발한 것은 우크라이나였다. 러시아의 국영 천연가스회사 가즈프롬은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를 1000㎡당 50달러에 공급해왔다. 러시아의 발표대로라면 이 가격은 230달러로 대폭 인상된다. 우크라이나는 이에 대해 단계적 인상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러시아는 가격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가스 공급을 끊겠다는 입장이다.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같은 조치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노선 추구를 중단시키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그는 “러시아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다”면서 “러시아는 결코 가스 공급을 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셴코는 천연가스 공급이 중단될 경우 흑해 항구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함대에 대해 연간 임차료를 9800만 달러에서 25억 달러로 인상하고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에 대한 수수료도 역시 인상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에너지 문제가 양국간 불안요소로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양국은 2005년 12월 19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총리회담까지 가졌지만 합의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서방 유명인사 ‘얼굴마담’ 영입도

지난해 11월 22일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북유럽가스관 컨소시엄 감독위원회 의장이 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러시아의 에너지 외교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인물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다. 11월 22일 총리직에서 물러난 슈뢰더가 얻은 새 직장은 ‘북유럽가스관 컨소시엄(NEGP)’의 회장 격인 감독위원회 의장이다. 이 콘소시엄은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발트해를 통해 유럽으로 공급하기 위해 설립된 것으로 지분의 51%를 가즈프롬이 갖고 있다. 유럽 언론들은 이를 두고 러시아가 슈뢰더를 내세워 서유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는 서유럽으로 공급되는 가스 수출량을 조절함으로써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서 “슈뢰더의 영입은 이 과정에서 예상되는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슈뢰더가 이 제의를 수락하자마자 독일과 유럽 각국에서는 슈뢰더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더구나 이 컨소시엄은 슈뢰더가 독일 총리 자리에 있을 때 독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설립됐고 독일이 상당한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NEGP의 실질적 책임자인 마티아스 바르니크는 구 동독비밀경찰(슈타시) 출신으로 푸틴이 구 소련의 KGB 동독 책임자로 일하던 80년대부터 친분관계를 쌓아온 인물이다.
자신의 재임 중 성사된 사업에 퇴임하자마자 관여하게 된 것을 두고 독일에서는 “슈뢰더가 돈에 팔려갔다”며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반발이 일었다. 독일 자민당의 디르크 니벨 사무총장은 슈뢰더가 NEGP로부터 재임 중 자신의 역할에 대한 대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부정 의혹을 제기했다. 또 정치인이 퇴임한 이후 2년 동안은 경제분야에 취업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독일 정치권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영석유회사 가즈프롬 본부 전경.
러시아는 슈뢰더 외에도 미국 조지 부시 1기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도널드 에번스에게도 비슷한 제의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2월 20일 “에번스가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즈네프티의 회장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러시아가 서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에너지 시장까지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유럽 일각에서는 푸틴이 에너지를 앞세워 신제국주의적 야망을 실현시키려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가 서방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과거 소련의 실질적 통제하에 있었던 동유럽 국가들을 다시 지배하고 유럽 경제를 좌우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넣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타우타스 란스베르기스 전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푸틴의 에너지 정책은 제국주의적 야심에 바탕을 둔 구 소련의 모든 외교정책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며 “러시아의 에너지에 의존하게 되는 순간 유럽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제부/유신모 기자 simo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