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체트 심판 ‘기력 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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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검찰, 전 독재자 90세에 또다시 기소… 죽기 전에 ‘법정 세우기’ 의지

칠레의 전 군사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칠레 검찰의 끈질긴 전쟁이 다시 불붙었다. 칠레 검찰이 11월 23일, 90세 생일을 이틀 앞둔 피노체트를 탈세·공문서위조·불법해외계좌 등 부패혐의로 기소했다가 법원이 600만 페소(약 1200만 원)의 보석을 허가하자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24일 다시 인권탄압 혐의로 기소했다. 두번째 기소내용에 대해 법원이 보석을 불허해 피노체트는 수도 산티아고 교외의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졸수(卒壽)를 맞게 됐다.

기소 내용은 ‘콜롬보작전’. 집권 초기인 1975년 군사정부가 최소 119명의 반체제 인사를 납치·살해한 비밀작전을 배후조종한 혐의다. 피해자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아 칠레법원은 ‘영구적 납치’로 정의하고 있으며, 최소한 3명의 피해자가 피노체트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피노체트는 정계퇴진 때까지 4개의 위조여권으로 해외은행에 차명계좌를 만들고 1980년~2004년까지 240만 달러(약 24억 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도 기소됐다. 그가 부패혐의로 기소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통치기간 중 챙긴 은닉자산은 28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측되면서 ‘독재자지만 청렴했다’는 지지자들의 옹호론은 타격을 입었다. 피노체트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더 늦기 전에 재판이 성사돼야 한다”며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끈질긴 법의 심판 칠레 검찰은 2001년과 2004년 두 차례에 피노체트를 연방법원에 기소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피노체트의 신속한 재판회부를 어렵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그를 겹겹이 보호한 ‘면책특권’이었다. 먼저 1978년 칠레 군사정권이 군사쿠데타 이후 발생한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사면을 법제화했다. 피묻은 손을 권력으로 닦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는 퇴임연도인 1988년부터 8년간 군 참모총장 직위를 유지해 면책특권을 가졌고, 1998년부터는 80년 제정된 헌법을 바탕으로 종신 상원의원직을 확보함으로서 다시 면책특권을 연장했다. (군사정권하에 제정된 이 헌법조항은 올해 9월 무효화되며 이번 재판에 길을 열었다.)

이차적으로는 피노체트 재판이 칠레사회의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대권을 계승한 파트리시오 아일윈은 “과거의 월권행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겠다”면서도 “가능한 영역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여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국제전략연구소의 아르멘 쿠윰지안은 “칠레 민간정부는 피노체트를 ‘비판이 불가능한 인물’로 여겼다. 아마도 이들의 두려움은 ‘우리가 그를 단죄한다면, 군부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였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피노체트의 실권 이후 1990년 칠레는 국가진실화해위원회를 설립해 피노체트 정부의 인권유린 조사에 착수했지만, ‘거물’ 피노체트는 건드리지 못했다.

전환점은 1998년 그가 신병치료차 머물던 런던에서 체포되면서 마련됐다. 스페인 법원이 영국과 스페인의 범죄인도협정 및 유럽테러협약에 따라서 과거 그가 스페인시민 등 94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 신병인도를 요구한 것이다. 피노체트의 변호사들은 “재판을 받게 된다면 스페인이 아니라 칠레에서 받겠다”며 맞섰고, 칠레인들의 손으로 독재자를 단죄하는 길이 열리는 듯 보였다.

피노체트는 ‘정신적으로 적당한 상태가 아닌 피고에 대해서는 기소를 금지’하는 칠레법을 꿰고 있었다는 듯 이후 치매와 가벼운 뇌졸중 진단서를 거듭해 내놨고, 재판은 일보진전 없이 수년을 끌어왔다. 이번 기소는 지난 11월 초 법원에 의해 지명된 의학전문가들이 피노체트를 검사한 결과 가벼운 치매증세는 있으나 재판에는 무리가 없다는 결론하에 이뤄졌다. 이들은 피노체트가 일부러 치매를 과장했다고 지적했다.

피노체트의 상흔 “칠레의 나뭇잎 하나도 나 몰래 흔들리지 못한다.” 피노체트는 1973년 아옌데 사회당 정권을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지 8년 만인 1981년에 자신있게 말했다. 칠레의 민주화 세력은 그런 그가 90년 정계에서 퇴진할 때까지 벌어진 각종 인권유린 행위를 몰랐을 리 만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철권통치하에서 정부기구에 의해 살해된 이들은 3197명, 고문당한 이는 약 2만8000명에 달한다. 칠레 검찰은 ‘죽기 전에 꼭 법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칠레의 박정희’로 비유되는 그를 둘러싼 칠레사회의 논쟁은 우리사회 못지않게 격렬하다. 지지론자들은 군인 출신인 그가 17년 독재기간 동안 ‘혼란과 공산주의로부터 칠레를 구하고’ 경제의 근대화를 일궈내며 남미에서도 잘사는 국가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바쳐왔다. 이들 눈에 피노체트는 칠레의 구세주다.

반대론자들은 국민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살해하고 대통령직을 차지한 뒤, 자국민을 불법적으로 감금·고문·납치·살해한 피노체트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영국으로 망명한 지 30년이 되는 로베르토 나바레테씨는 의과대생이던 1973년에 ‘아옌데 지지자라는 이유’로 악명높은 ‘국립체육관’에 1년간 수용된 채 고문을 당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피노체트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듯) 단순히 보복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다. 민주정부라면 과거의 과오를 척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각에서는 이번 피노체트 기소도 성과없이 끝날 가능성을 우려한다. 전문가 쿠윰지안은 “피노체트에 대한 지지도가 세금포탈 혐의가 제기된 후 급감하고 있지만, 동시에 국민의 관심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면서 “피노체트에 대한 국민의 태도는 그가 죽어서야 확실히 드러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례를 전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국장으로 치를지, 아니면 필부(匹夫)의 평범한 마지막 길로 치를지 여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칠레의 사례 속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면, 과연 대한민국 사회는 그를 인권 관련 혐의로 법정에 세울 수 있었을까. 사후 기념관 건설을 둘러싸고도 첨예하게 맞붙는 국민여론은 어떤 방식으로 반응했을까. 역사에 대한 가정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피노체트 연혁

1970년 사회당 출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당선
1973년 8월 아옌데, 피노체트를 군 참모총장에 임명
1973년 9월 피노체트 주도의 우익 군부 쿠데타 발생. 미 중앙정보부(CIA) 개입설
1974년 대통령으로 집권
1988년 대통령임기 연장법 국민투표에서 패배
1990년 정계은퇴
1998년 인권유린 혐의 관련 스페인 영장발부로 런던에서 체포됨
2000년 건강악화 이유로 석방
2001년 칠레검찰, 인권유린 혐의로 기소.
2002년 법원, 건강 이유로 재판불가 판단, 보석 허가
2004년 칠레검찰,‘콘도르 작전’인권유린 혐의로 기소.
5월, 칠레법원 인권사건 관련 피노체트 면책특권 박탈
2005년 3월, 피노체트 비밀계좌 무더기 발견. 횡령 관련 면책특권 박탈.
11월 칠레검찰, 인권 및 세금포탈 등 혐의로 기소


<국제부/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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