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브랜드가 나를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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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품에 밀려 명맥만 이어가는 상품들… 옛 명성 못잊어 찾는 사람들 꾸준해

[경제]추억의 브랜드가 나를 부르네

현재 다단계 판매회사의 영양제를 먹고 있는 박모씨(회사원·45)는 ‘원기소’가 다시 시판된다는 소식에 아련한 추억에 젖었다. 박씨는 초등학교 시절, 원기소를 무척 복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끼니 때우기에도 벅찬 집안 사정을 감안할 때 꿈 같은 얘기였다. 그 당시 박씨 주위에서는 일부 부잣집 아이들만 먹을 수 있었다. 박씨에게는 원기소가 그렇게 각인돼 있어 한 번쯤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원기소를 비롯해 이명래고약, 삼표연탄·삼천리연탄, 동아연필·문화연필, 유엔성냥, 빠이롯트만년필, 범표고무신 등은 한때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상품들이지만 대체상품에 밀려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추억의 상품이 돼버린 것이다. 장수 브랜드가 되려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소비자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끊임없는 품질 개선과 후속모델의 개발 등이 이어져야 한다. 제품이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대적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브랜드의 운명은 다하고 만다. 예컨대 이명래고약은 후시딘 등 항생연고제에 밀려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완전히 운명을 다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추억의 상품으로 명맥은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이들의 명성을 잊지 못하는 ‘추억의 세대’가 이들을 찾기 때문이다. 서울예술대 광고창작과 윤준호 교수는 “같은 세대나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 상표나 상품은 중요한 코드 노릇을 하고 있다”면서 “그래서 이들의 생활을 지배한다”고 설명했다.

원기소-어린이 영영제의 대명사

대표적인 것이 원기소다. 원기소는 1950년대 후반부터 판매되기 시작해 어린이 영양제의 대명사로 통했다. 하지만 제조사인 서울약품이 1980년대 중반 부도가 나면서 생산이 중단됐다. 원기소는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40∼50대는 물론 30대 후반 사람들에게도 대표적인 어린이 영양제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박씨와 같은 사람이 많다.

이러한 원기소를 서울약품공업에서 다시 생산하기로 했다. 이 회사는 원기소를 생산하다가 폐업한 구 서울약품의 영업권·상표권을 인수하고 경기도 여주에 공장을 건설 중이다. 공장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생산할 예정이다. 서울약품공업 이정철 전무는 “원기소는 1960·1970년대 영양제의 대명사였는데, 이를 만들어서 그 때 당시와 상황이 비슷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보내줄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약품공업은 오리지널 원기소뿐만 아니라 현대적이 감각에 맞게 흑미 원기소, 후르츠 원기소 등 다양한 종류의 원기소를 내놓을 예정이다.

이명래고약-전 국민의 고약

종기(부스럼) 치료의 대명사였던 이명래고약도 현재 생산이 미미하다. 이명래고약은 30대 중반 이상이면 한 번쯤 사용해본 ‘전 국민의 고약’이었다. 종이에 싸여 있는 까만 고약을 불에 녹여 환부에 붙이면 종기의 고름이 쏙 빠지고 상처가 잘 아문 경험이 있다.

그런데 이명래고약은 명래제약(주)과 명래한의원 두 갈래로 전승되고 있다. 양측은 맥을 잇는 과정에서 정통성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벌여왔다. 현재 생산하고 있는 곳은 명래한의원뿐이다. 고인의 막내딸 이용재 여사가 운영하던 명래제약은 경영난으로 2002년 이후 휴업한 상태다. 약국에서 팔던 고약은 명래제약에서 생산하던 것이다. 명래한의원이 생산하는 이명래고약은 약국에서 팔지 않는다.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명래한의원에 가야만 구입할 수 있다. 명래한의원은 한의사 임재형 원장이 운영한다. 이명래의 사후 사위 이광진이 뒤를 이었고 이광진마저 1996년 세상을 떠나자 임 원장이 장인인 이광진의 가업을 계승했다.

삼표연탄·삼천리연탄-월동의 필수품

[경제]추억의 브랜드가 나를 부르네

동아연필·문화연필-전 국민의 필기구

과거 초등학교 시절 연필을 깎는 일은 고역이었다. 나무결을 따라 잘 깎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상당히 힘을 줘야 깎이는 것이 있어서 비록 비싸지만 ‘좋은’ 연필을 사야 고생을 덜했다. 그 당시 대표적으로 ‘좋은’ 연필은 동아연필과 낙타표 문화연필이다. 동아연필이 판매량에서 앞섰지만 용호상박이었다.
그러나 볼펜과 샤프펜슬 등 대체 필기구와 컴퓨터의 보급으로 연필 사용량은 급격히 줄었다. 과거보다 취학아동수가 준 것도 한몫을 했다. 실제로 동아연필과 문화연필의 판매량은 미미한 수준이다. 동아연필 박선줄 이사는 “월 판매량이 1억~2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문화연필을 생산하는 KPI의 최남태 전무도 “이제는 많이 줄어 연필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미미하다”고 전했다. 요즘 연필은 어린이의 취향에 맞게 캐릭터나 그림을 연필 주변에 새겨 넣는다.

유엔성냥-성냥회사의 대명사

팔각형 모양의 유엔성냥은 이사나 개업식 때 “불처럼 일어나라”며 선물로 사들고 다녔던 통성냥이다. 유엔성냥은 스페인 화가 고야의 ‘나체의 마야’를 성냥갑에 인쇄했다가 법원으로부터 “명화를 모독하여 음화화했다면 이는 음란물”이라는 유죄판결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덕분인지 당시 성냥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팔각형 모양의 유엔성냥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성냥 소비가 급격히 줄어든 데다 값싼 중국산 성냥과 라이터가 마구 수입돼 사양화의 길을 걷고 있다. 결국 성냥회사의 대명사였던 유엔성냥은 생산시설을 파키스탄에 판 후 수입포장업체로 업종을 전환했다. 이제 유엔성냥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조완제 기자 jw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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