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가난은 대물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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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한 나라’ 프랑스의 소요 원인… 아랍식 이름만으로도 취업·주택임대서 불이익

지난 10월 27일 두 아프리카계 10대 청소년이 경찰의 검문을 피해 변전소에 숨었다 감전사한 사건이 발생한 후 들불같이 일어난 젊은이들의 소요사태로 2주 동안 프랑스 전역에서 불탄 차량만 7000대를 넘었다. ‘인권선언’의 나라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무지막지한 야간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젊은이들의 분노는 세계 지성계를 뒤흔든 ‘68혁명’에 비견되기도 한다. 물론 이번에 화염병을 던진 젊은이들이 68혁명 때처럼 고학력자도 아니고, 이들의 주장에는 어떤 정치적·철학적 고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름없는 ‘추리닝’ 청년들의 ‘불장난’은 장난으로만 그칠 것 같지 않다. 프랑스 뿐 아니라 선진 각국의 정책입안자들과 사회학자들에게 아주 무거운 고민거리를 안겨준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내 남동생들은 ‘카멜레온’이에요. 집에서는 아주 얌전하지만 밖에 나오면 무섭게 돌변해요. 혼자 있을 때는 절대로 그런 짓 하지 않아요. 끼리끼리 모이기만 하면 그래요.”

초반 소요사태가 가장 심각했던 올네 수 부아에 사는 18세 여학생이 ‘폭력반대 침묵시위’에 나왔다가 11월 7일 ‘르 몽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젊은이들의 부모 또는 조부모들은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국가에서 이민와서 프랑스 사회에 정착했다. 건물청소, 식당일 등 이른바 ‘3D 업종’에 종사하며 프랑스의 일원이 됐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못 붙인다. 눈 뜨면 보는 것이 HLM이라 불리는 구질구질한 빈민 아파트 동네에 ‘말썽쟁이’ 형님들 뿐이기 때문이다. 10대 초반에 이미 마약에 손대기도 하고, 퇴학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아랍어보다 불어에 더 익숙하고 월드컵 때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지만 누구 하나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프랑스 백인들도 이들을 진심으로 같은 프랑스인으로 대해주지 않는다.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날짜 ‘르 몽드’에 ‘분노한 청년들과 함께 한 하룻밤’이라는 르포 기사를 보면 이들이 좀더 분명하게 보인다. 소요사태가 한창 커지던 11월 6일 저녁 8시 6명의 아프리카계 젊은이들이 파리 근교 오베르빌리에의 한 HLM 앞에 모였다. 잠시 후 한 청년이 두터운 외투차림으로 나타났다. 가슴께가 불룩했다. 그날 밤 쓸 ‘소품’을 옷 속에 감춰온 것이다. 한 청년이 “불행하게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라고 기자에게 말한 뒤 씩 웃으며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불을 붙였다. 행동이 시작된 것이다. 무언가에 불을 붙이는 것은 이들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특히 차량 방화를 가장 즐긴다.

나이가 가장 어린 청년(17)은 2시간 전 혼자서 푸조 607을 불태웠다고 자랑했다. 차창을 깨뜨리고 직접 만든 화염병을 던져넣으면 눈앞에서 바로 불이 확 일어난단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는다. 그 차량이 경찰차라면 거의 영웅 대접을 받는다. 나이가 21세인 한 청년은 자신이 불태운 경찰차를 찍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무리중 최연장자로 약혼녀까지 있는 청년(25)은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사르코(사르코지)’라는 인종주의자 놈을 ‘카르처’(사르코지가 문제 청년들을 쓸어버리겠다며 언급한 진공청소기 브랜드)로 쓸어버릴 거예요, 왜냐면 그도 인간쓰레기니까.” 사르코지 장관이 했던 모욕적인 말을 주어, 목적어만 바꿔 그대로 되돌려준 것이다.

사르코지 장관은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며 강경진압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이들을 이끄는 리더는 없어 보인다. 각자 알아서 화염병 등 자기 몫의 무기를 준비해 오는 식이다. “사실 우리가 정말 조직이라면 수류탄도 있을 거고, 칼리니시코프 소총도 갖고 있겠죠”라는 한 청년의 말처럼.

‘만인이 평등한 나라’에 사는 ‘2등시민’

프랑스는 ‘톨레랑스’라는 가치로 상징되듯 이민자들에게 가장 관대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2차 대전 이후 알제리 등에서 이민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미테랑의 사회당 정부를 거치며 노동력 충원을 이유로 세계 각지에서 더욱 많은 이민자들이 입국했다.

국적 취득 요건도 까다롭지 않았다. 프랑스에 살면서 불어능력 시험을 통과하고 간단한 요건만 갖추면 국적취득과 함께 프랑스인이 받는 모든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공화국 시민이 된 이상 어떤 차별도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헝가리, 폴란드 등 유럽권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올 때만 해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사르코지 장관도 헝가리 이민자 2세다. 그러나 모슬렘 이민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며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은 종교적인 이질성으로 인해 정교분리 국가인 프랑스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자녀들 교육에도 비교적 신경을 덜 썼다. 이들은 주로 3D업종에 종사했으며 자연스럽게 땅값이 싼 대도시 외곽으로 몰렸다.

프랑스 정부는 1975년부터 사회통합을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1996년에는 도시 외곽에 751개의 도시민감지역(ZUS·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돼 도시정책의 우선대상이 되는 지역)을 지정해 이들에게 감세 등의 혜택을 주며 관리해왔다. 그러나 이는 이들을 돕기보다는 지역의 슬럼화를 촉진했다. 빈민 이민자들이 혜택을 받으려고 이곳으로 몰려들자 프랑스 백인들이 서서히 빠져 나가 지리적인 분리가 이뤄졌다.
이후 경기 침체가 찾아왔고 정부는 예전처럼 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각종 혜택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내 이 지역의 실업률은 프랑스 평균(10%)의 2배를 넘어섰고 대부분 우범지대로 변했다. 이번에 소요가 발생한 곳도 대부분 이런 지역이다. 모슬렘 자녀들은 아랍식 이름만으로도 취업과 주택 임대에서 원천적으로 거부당하는 사례가 잦아졌다. 가난은 대물림됐고, 이들의 삶에 희망은 사라졌다. 프랑스 백인들에게는 무슬림들이 ‘구제불능’ ‘골칫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프랑스 내에서는 ‘끝까지 책임도 못 질 것을 왜 그렇게 무작정 받아들였느냐’는 비난과 ‘우리는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모슬렘들의 책임이다’는 견해가 대립했다.

이번 사태 직후 영·미 언론들은 프랑스식 사회모델이 처음부터 이런 한계를 갖고 있었다며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우리도 언제든 저럴 수 있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인권, 자유, 평등의 나라 프랑스마저 극우파가 힘을 얻는 것은 시간 문제인 듯하다.

<국제부/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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