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밤은 라마단에 대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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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금식예배 전통적 의미 변질… 파티와 과식의 기간으로 전락

라마단은 전 세계 18억 모슬렘들이 한 달간 낮시간에 금식하는 성스러운 기간이다. 모슬렘들은 금식을 통해 유일신인 알라에 대한 자신의 신앙심을 시험하고 금식의 약속을 지켜낸 자신을 자랑스러워 한다. 신의 은총에 감사를 표시하는 일종의 정신적 수양 과정이자 축제인 셈이다.

올해 라마단은 지난 10월 4일과 5일을 기해 전 세계 이슬람 국가에서 시작됐다.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를 반영하듯 외신들은 경쟁적으로 각국의 라마단 풍경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 라마단을 소개하는 외신 중에는 라마단의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내용이 많다. 라마단의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과 이에 대한 독실한 모슬렘들의 우려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라마단 시작에 맞춰 보도한 특집기사를 통해 ‘낮에 금식과 기도를 하고 밤에 쇼핑몰로 달려가는’ 이슬람 사회의 풍속을 자세히 소개했다. 신문은 “번쩍이는 장식물이 거리를 메우고 계산대의 서랍 열리는 종소리가 쉴새없이 들려오는 라마단 풍경은 이미 예전의 라마단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라마단 안부카드가 유행하고 상점의 세일광고가 넘치는 지금의 라마단은 기독교의 크리스마스나 유대교의 하누카처럼 변했다. 종교적 경건함 속에 상업주의가 파고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특수 노리는 상업주의에 물들어

라마단은 태음력인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에 해당하는 성월(聖月)이다. 이슬람 8월의 마지막 날 저녁 사막에 나가 초생달을 보고 온 성직자의 선언으로 라마단은 시작된다. 라마단은 낮에 물과 음식뿐 아니라 부부관계·담배·욕설·거짓말·화장 등도 금한다. 남자는 8세, 여자는 7세부터 금식을 하지만 노약자나 임산부, 환자 등은 하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은 더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모슬렘들에게 물도 먹지 않고 굶는다는 것은 큰 고통이다. 그러나 금식은 인내를 의미하며 인내는 곧 신앙심과 연결되기 때문에 금식을 하는 것은 신앙심을 시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일몰과 함께 금식이 끝나면 시험을 이겨낸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는다.

해가 지면 스프와 같은 유동식을 먹고 저녁 기도를 드린 뒤 ‘이프타르’라는 라마단 음식을 먹는다. 아침식사라는 뜻의 이프타르는 저녁에 먹는 아침식사로 단식을 깨뜨린다는 의미가 있다. 단식이 끝난 저녁시간은 음식이 넘친다. 친척이나 친지를 방문하기도 하고 축제 분위기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해가 뜨면 모슬렘들은 모스크에 모여 새벽기도를 하고 또 하루의 금식을 신에게 약속한다.

라마단은 모슬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5가지 원칙(신앙고백·기도·라마단·헌금·성지순례) 중 하나다. 시대가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모슬렘들은 이처럼 엄격한 규율을 29일간 지키며 성스런 라마단을 보낸다.

미국 프로농구 NBA의 간판선수인 샤리프 압둘 라힘(새크라멘토 킹스)은 미국인이면서도 라마단을 엄격히 지키는 독실한 모슬렘이다. 그는 라마단 기간 동안 낮에 열리는 경기에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48분의 농구경기를 감당해낸다. 작전타임 도중 동료 선수들이 벌컥벌컥 이온음료를 들이켜는 동안 그는 갈라진 입술에 물수건을 대는 것으로 갈증과 고통을 참는다. 경이롭게도 라마단 기간 동안 그의 낮 경기 개인 성적은 평소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압둘 라힘처럼 철저하게 라마단을 지키는 모슬렘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에 시작된 라마단의 전통이 현대적 의미와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 국가인 예멘의 한 언론은 최근 관용과 금욕을 실천하기 위한 라마단 기간 동안 오히려 가정불화가 늘어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금식으로 인한 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누적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금식 도중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운전자들은 신경이 예민해져 교통사고 증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같은 이유로 라마단 단식에 참가하지 않는 모슬렘이 많다. 다만 이들이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해 노골적으로 라마단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직장인들은 라마단 기간 동안 일찍 퇴근해 이프타르를 즐기고 가족·친구들과 파티를 즐긴다. 이같은 변화를 반영하듯 호텔과 유명 식당들은 ‘라마단 패키지 상품’을 전통적 라마단의 밤을 즐기라는 선전과 함께 내놓고 고객들을 유혹한다. 이 때문에 일부 아랍국가에서는 “라마단이 파티와 과식의 기간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낮동안 굶었던 터라 이들이 밤에 먹는 음식량은 평소보다 훨씬 많다. 이슬람 국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라마단에 대비해 식료품 공급을 최대한 늘리는 비상체제를 가동한다. 라마단 기간 동안 식료품을 원활히 공급하지 못해 품귀현상이 빚어지거나 가격이 폭등하면 정부에 대한 원성이 쌓이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상인들은 해마다 말린 과일·견과류·대추야자·홍차 등 라마단 음식들의 가격을 올린다. 금식기간에 오히려 음식이 모자라는 기현상도 빚어진다.

중동국가 쇼핑가 밤새도록 영업

서구화가 상당히 진행된 이집트·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중동 국가에서는 레스토랑과 쇼핑센터 등이 일몰 후 개장을 해 새벽까지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는다. ‘파누스’라는 형형색색의 라마단 등(燈)을 달아놓은 백화점과 상점들로서는 라마단이 최대의 대목이다. 라마단 기간 동안 1년 매출의 30% 이상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경품까지 내걸고 고객유치에 총력을 기울인다.

라마단 기간은 또 TV 광고가 홍수를 이루는 기간이기도 하다. 저녁시간 가족 친지들이 TV 앞에 모여 앉아 음식을 먹으며 라마단 특집 드라마와 영화 등을 감상하기 때문에 이 기간은 광고주에게는 황금과 같은 시간이다. 의류·가전·자동차 업체들은 라마단 기간 동안 방송될 광고를 특별 제작하고 엄청난 액수의 특별 광고비를 책정해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지금 이슬람 국가 중 라마단을 1400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는 나라는 없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모슬렘들은 여전히 라마단의 본질은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 라마단을 지키는 의지가 예전보다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라마단은 모든 모슬렘에게 신앙을 재무장할 수 있는 중요한 기간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두바이의 이슬람부(部) 고문인 셰이크 아메드 압델아지즈 하다드는 “지금 라마단이 상업주의에 물들어가는 것은 무엇이 영혼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모르는 모슬렘들의 무지 때문”이라며 “이 기간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보호하려는 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부/유신모 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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