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마루타’는 끝까지 저항”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중국 하얼빈 731부대 생체실험 현장을 가다… 신원확인된 한국인 희생자는 6명뿐

[월드리포트]“한국인 ‘마루타’는 끝까지 저항”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우리에게 친숙한 중국 흑룡강(黑龍江)성 하얼빈시. 시내 도심에서 남쪽으로 20㎞ 남짓 떨어진 평방(平房)구에는 일본 관동군이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을 비롯해 중국인, 구소련인, 몽골인 등 적어도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악명높은 생체실험을 한 731부대 본관 건물이 남아 있다.

1935년에 세워져 70년이 지난 지금은 기념관으로 바뀌어 생체 실험 당시를 재현한 모형이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본관 건물에 들어서면 2층 전시실로 곧장 오르게 되어 있다. 모두 15개로 이뤄진 전시실을 지나면 밖으로 나가기 전에 긴 회랑을 거쳐야 한다. 회랑에는 자료로 확인이 된 생체실험 희생자들의 명단과 체포 날짜가 대리석 명판에 새겨져 4개씩 22줄로 이어져 있다.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한국인 2명의 이름이었다.

심득룡(沈得龍), 이청천(李淸泉). 특히 소련 코민테른이 파견한 첩보원인 심득룡에 대한 자료는 전시관에 많이 남아 있었다. 전시관 1층에 있는 제13전시실에는 그가 중국인 부인과 다정하게 찍은 결혼식 사진도 걸려 있다. 제11전시실에는 심득룡을 731부대로 호송한 일본 헌병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항일투사 이청천도 희생돼

심득룡의 중국인 처남인 류중스(劉忠實·77) 노인이 딸의 부축을 받으며 최근 전시관을 찾아 중국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류중스 노인은 1943년 10월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 이후 줄곧 소식을 알지 못했던 매형이 생체 실험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확인한 뒤 현재 살고 있는 요녕성 번시에서 하얼빈으로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류 노인은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매형의 명판에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바친 뒤 기나긴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1942년, 당시 14세때 대련(大連)에서 사진관을 하던 매형 집에 들러 보름 정도 머물렀다고 회고하며 당시 매형이 한밤중에 무전으로 타전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월드리포트]“한국인 ‘마루타’는 끝까지 저항”

그동안 731부대 관련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온 하얼빈시 사회과학원 연구소에 따르면 심득룡은 1911년 생이다. 1929년 4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소련 모스크바 공산주의 대학에서 4년 동안 유학했다. 소련 코민테른의 명령을 받아 중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0년 3월. 그는 팔로군 군관 신분으로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1943년 10월 1일 밤. 그가 아지트로 삼았던 사진관에서 무전 타전을 마치는 순간, 40여 명의 일본 헌병이 들이닥쳤다. 일본군은 그동안 대련의 모처에서 발신되고 있는 괴전파를 추적하던 터였다. 심득룡은 헌병대의 조사를 받고 이듬해 봄 731부대로 압송됐다.

생체 실험으로 목숨을 잃은 다른 한국인 이청천은 항일투사다. 그는 1944년 7월 중국과 몽골 국경지대에 있는 네이멍구 자치구의 하이라얼에서 반일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체포됐다.

하얼빈시 사회과학원 731연구소는 최근 이들 희생자 2명 외에 4명의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인적 사항을 추가로 찾아냈다. 이기수(이하 체포 당시 나이 28세·함북 신흥군 동흥면, 1941년 7월 20일 체포), 한성진(30·함북 경성, 1943년 6월 25일 체포), 김성서(함북 길주면, 1943년 7월 31일 체포), 고창률(42·강원도 회양군 난곡면·1941년 7월 25일 체포) 등 4명은 모두 길림성 훈춘에 살고 있을 당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이 가운데 고창률(高昌律)의 인적 사항은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진다.

그는 1941년 소련을 위해 일본군 정보를 수집했다. 그 뒤 비밀 활동이 탄로나자 체포될 위험이 있으니 잠시 피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훈춘에서 하얼빈으로 대피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일본군 헌병대는 고창률에 대해 “소련의 명령을 받고 활동 경비로 백수십만원을 타고 만주 일대를 다니며 간첩활동을 자행해, 남겨둬봐야 역첩보 활동을 할 가치가 없으니 ‘특별이송’함이 적당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간인도 ‘실험재료’로 특별이송

‘특별이송’은 만주 지방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가 체포한 항일 독립운동가나 국민당 국군이나 공산군 포로, 외국의 첩보원 등을 대상으로 취조를 한 뒤 완강하게 버티는 인사들은 ‘개전의 정이 엿보이지 않는다’거나 ‘항일정신이 뼈에 사무치니 없애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이유로 생체실험 자료인 ‘마루타’(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로 지정해 재판도 없이 압송하는 것이다. ‘실험 재료’가 모자란 탓에 애꿎은 민간인이 헌병대에 의해 731부대로 특별이송된 경우도 있었다.
다음은 한국인을 ‘특별이송’한 자료중 일부다.

시기:1939년 6월

명령자:하얼빈시 신시가헌병분대장 소좌 아카기 모리미

내용:하얼빈 교외에서 중국 공산당 아청현 위원회 소속 중국과 한국인공작자 25명 이상이 회합하고 있음을 정찰해 전원 체포했음.

결과:비행장에서 이시이부대가 독약을 주사해 사망.


이 자료는 하얼빈에서 가까운 아청현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공산당원들이 하얼빈 교외에서 회의를 하다가 체포돼 731부대 비행장에서 독극물 실험 재료로 쓰인 뒤 살해됐음을 보여준다.

731부대는 마루타를 가둘 특설 감옥을 지었다. 네모진 벽돌집 안에 지은 감옥은 2개로, 7호 감옥은 서쪽에, 8호 감옥은 동쪽에 있었다. 실험실 조수로 일했던 우에다 미다로의 전후 증언에 따르면 1942년 4월 세균 실험을 받은 중국인의 병세를 살피러 7호 감옥으로 들어갔을 당시 조장이 “함부로 일본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이 감옥에는 한국인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일본말을 안다”고 말했다. 한국인 마루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월드리포트]“한국인 ‘마루타’는 끝까지 저항”

또 독가스 실험장에서 일했던 한 부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마루타를 실험할 때는 먼저 바퀴 달린 궤도차에 기둥을 세우고 그곳에 마루타를 동여맨 뒤 곧장 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된 실험실로 밀어넣었다고 한다. 부대원이 마루타를 궤도차에 동여맬 때면 대부분은 뭘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바둥거리며 욕을 마구 퍼붓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면 경비 임무를 맡은 특별반원들이 몽둥이로 마루타를 때려 실험실로 밀어넣곤 했다. 당시 가장 많이 반항하고 몸부림치는 마루타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진청민 731연구소 소장은 “현재까지 파악한 한국인 희생자 6명의 유족을 찾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며 “앞으로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한국인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731부대에서 희생된 한국인은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이 2차대전 전후인 1946년 도쿄 전범재판정에서 밝힌 254명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하얼빈/홍인표 특파원 iphong@kyunghyang.com>


월드리포트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