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자본주의 미국 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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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해양석유, 美 유노칼 인수 좌절… “정치논리가 훼방” 불만 터뜨려

“한 전선에서의 전술적 후퇴는 때로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중국의 석유회사 중국해양석유(CNOOC)가 8월 2일 미국 석유회사 유노칼(Unocal)을 인수하려던 시도를 포기한 것에 대해 미국 ‘뉴욕타임스’가 손자병법의 한 구절을 인용해 촌평한 것이다. 자국 에너지산업을 넘보던 중국의 시도를 좌절시킨 데 대한 안도감과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 아니냐’ 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담긴 것으로 보인다.

평소 ‘자유시장’을 강조하던 미국이 막상 중국의 ‘붉은 자본’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전국민이 단결해 일단 물리쳤다. 그러나 양국간 싸움터는 전세계로 확대될 조짐이다.

‘신황화론(新黃禍論)’에 맞선 미국판 ‘금모으기’? CNOOC는 지난해 12월 유노칼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중국은 에너지 수요가 계속 늘어나면서 현재 하루 600만 배럴인 석유 수요의 약 4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에 있어 유노칼 인수는 일개 기업의 영리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사활이 걸린 문제였던 셈이다.

CNOOC(185억 달러 전액 현금 지불)는 유노칼 인수를 위해 경쟁자인 미국기업 셰브론(174억 달러 상당 현금 및 주식 인수)보다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저리융자 주선과 같은 중국정부의 전폭 지원 아래 가능했다. 중국민들은 “미국 석유회사 인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관영 ‘신화통신’ 등의 보도를 거의 매일 접하며 ‘우리 경제도 미국을 앞설 수 있다’는 자부심마저 느끼던 터였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경제적 부상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미국민들에게 중국기업이 자국기업을 인수하려 한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1980년대 일본의 ‘자본공습’에 비견돼 자칫 에너지 주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으며 안보 위기도 거론됐다.

푸청위(傅成玉) CNOOC 회장이 값비싼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미국 회사 인수에 집착한 것은 안정적인 석유조달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중동의 경우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매력이 떨어졌다.

미국 내 반대여론을 의식한 CNOOC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딕 체니 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을 로비스트로 동원하는 한편 미 대형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JP모건을 주간사로 내세웠다. 185억 달러 현금 지불이라는 파격 조건도 모자라 미국에서 생산한 석유와 천연가스의 해외반출 금지 및 근로자 전원 고용승계 등의 조건까지 걸었다. 공산주의 국가가 71% 지분을 가진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약점으로 작용했지만 이를 제외하면 CNOOC는 여러 모로 서구 기업의 외양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초반에 엎치락뒤치락 하던 CNOOC와 셰브론의 경쟁에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 의회가 뛰어들면서부터. 미 하원은 지난주 입찰에 앞서 중국자본을 받아들이는 것이 국가안보에 유해한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대통령 직속기구 ‘해외투자심사위원회(CFIUS)’의 심사 기간을 최장 120일까지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원정팀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지연 작전을 쓴 것이다.

높은 인수가를 제시한데다 미국 언론광고까지 동원하며 승리를 자신하고 있던 CNOOC는 커다란 벽에 부딪혔음을 느꼈다. 120일이나 늦어지는데 드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미 의회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한 유노칼을 인수하더라도 정상적인 기업 환경에서 장사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급기야 CNOOC는 성명을 통해 “미국의 정치적 환경 때문에 인수계획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또 “미 의회가 정치적 동기에서 우리의 인수를 노골적으로 반대한 것은 유감스럽고, 정당하지 못한 조치”라고 비난했다.

이로써 유노칼은 CNOOC보다 훨씬 불리한 인수 조건을 제시한 셰브론으로 넘어가게 됐다. CNOOC는 막판에 200억 달러까지 지불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용평가회사 피치의 샹마 분석관은 “CNOOC가 셰브론 및 유노콜, 그리고 미 의회와 한꺼번에 싸우기는 버거웠을 것”이라고 AFP 통신에 말했다.

“자유기업 원칙은 없었다” 중국기업의 유노칼 인수 시도에 대한 미국인들의 대응 과정에 시장논리는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이 지금껏 개발도상국들에 시장개방을 요구하며 그토록 강조한 ‘신자유주의’ ‘완전경쟁시장’의 이상은 ‘안보 논리’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였다. 미국의 시장개방 요구에 저항하던 개도국들의 논리 역시 ‘국가안보’였음을 상기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의 전방위 방해작업을 ‘파울 플레이’라고 비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8월 3일자 사설에서 “중국(시장)이 미국 기업에 갖는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번 유노칼 인수전에서 중국편을 들어준 목소리가 미국 내에 없었다는 점은 놀라울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과 미국은 둘 다 석유를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여서 산유량 증가와 유가 인하에 공통된 이해를 갖고 있다”면서 “그런데도 미국 정치권이 공정한 인수계약 자체를 훼방한 것은 (시장의 관점에서) 옳지 못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미국은 중국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CNOOC가 셰브론보다 월등히 높은 인수가격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국책은행의 저리융자 때문이다. 이 점이 미국민들을 더욱 똘똘 뭉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엄청난 무역적자를 해외투자 유치 등으로 메우는 미국이 막대한 해외투자자본을 내친 것은 그동안 강조해온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와 베네수엘라의 PDVSA 등 국영 석유회사의 자본을 유치할 때에는 넙죽넙죽 고맙게 받아들였다. 중국의 CNOOC는 미국 내 반중국 정서의 희생양이었던 셈(‘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이다.

중국은 가만히 있을까? 미국의 훼방으로 유노칼 인수에 실패한 중국은 당장 보복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자국 에너지 산업을 지킨 것이 결국 여러 측면에서 미국 국익에 이롭지 않게 작용할 가능성도 높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중국은 이제 드러내놓고 공격적인 에너지 정책을 펼 것”이라며 “카스피해 연안 등 중앙아시아 지역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접근권을 놓고 미국과 더욱 경쟁할 것이 뻔하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이 지역에 주둔 중인 미군 철수를 더욱 강력하게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특히 미국과 관계가 좋지 않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할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중국 석유기업들은 이란, 수단, 미얀마 등 미국과 관계가 좋지 않은 나라들과 손잡고 석유자본을 투자하거나 원유공급처를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또한 미국의 가장 큰 소비시장이자 투자국이기도 한 중국은 당장이라도 미국 자본에 제한을 가해 보복할 수도 있다. ‘로이터통신’은 워싱턴 한 외교관의 말을 인용, “미 의회쪽에서 ‘중국이 이번 건에서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만족하지만 이것이 향후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미 국방부의 중국 군사력 보고서를 발표하며 중국의 군사위협을 부각시키고, 양국이 서로를 겨냥한 인권보고서를 각각 펴냄으로써 불편해진 중·미 관계는 또 한번 격랑에 휩싸일 전망이다.

<국제부/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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