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은 ‘보수우익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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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국과 외교마찰 때마다 돌출행보로 극우파 입장 곤혹

최근 일본 우익은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의미 있는’ 행보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들이 국체로 떠받들고 있는 일왕이 우익을 궁지에 몰아넣는 발언과 행동을 자주 해서다. 지난 6월 27일 사이판을 찾아 오키나와인과 한국인 전몰자 위령탑에 참배해 국내외의 주목을 받은 아키히토 일왕은 그 전에도 한·일, 중·일 관계가 냉랭해질 때마다 의미 있는 발언을 해왔다.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두고 역사 교과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가 불거진 2001년 12월 일왕은 “내 선조는 백제계”라고 발언했다. 이때 일본 매스컴은 ‘아사히 신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침묵을 지켰다. 중국인의 강력범죄로 일본 국내의 중국인 차별 문제가 심각하던 2003년 12월에도 “내 생애 가장 슬펐던 일은 300만 명 이상의 일본인과 수많은 외국인 희생자를 낳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며 “이 시기에 일본은 중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어 더욱 힘들었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이런 움직임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으로부터 반환된 오키나와를 방문한 1975년 당시 왕세자였던 아키히토 부부에게 누군가 화염병을 던졌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방문을 마쳤다. 이는 일왕제 폐지를 지지하는 일본 재야인사들이 처음으로 아키히토를 의식하게 된 사건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1933년생으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어린 나이에 소개(疎開)를 경험했다. 패전 후 선왕의 ‘인간선언’으로 달라진 왕의 지위를 실감하고, 1946년부터 4년간 미국인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에게 영어를 배웠다. 바이닝 부인은 민주주의 이념과 서민적 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바이닝 부인은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영향인지 아키히토 역시 당시 기독교인이던 평민 미치코와 결혼한다. 궁내청이 비밀에 부쳐 사실 확인이 어렵지만 일왕 부부가 기독교인이라는 소문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궁내청 관리 절반 가량이 기독교인이라고는 설도 있다.

왕실의 숙원은 ‘한국 방문’

미치코와 결혼한 아키히토는 그후 영국과 같은 ‘열린 왕실’을 지향한다. 역사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아 경비가 삼엄했던 쇼와 일왕과는 달리 외출시 교통신호 통제를 폐지하고 수행원을 최소화하는 등 종래의 관행을 개선했다. 그 외에도 해외 방문과 재해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늘렸다.

지금까지 50여개국을 방문한 일왕이 가장 염원하는 것은 한국 방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 왕실의 열린 개혁은 궁내청의 비밀주의와 일본 내 우익들 때문에 좀처럼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전후 ‘인간선언’으로 잠시 언론보도가 자유로웠지만, 1961년 일왕가가 살해당하는 꿈을 묘사한 소설을 연재했다는 이유로 출판사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사장 집에 우익이 침입해 가정부를 살해하고 부인에게 중상을 입히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후에도 매스컴의 관련 보도에 대해 크고 작은 협박이 있었다. 가깝게는 1990년 쇼와 일왕 사망 당시에 “쇼와 일왕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발언한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가 총을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우익이 국체로 떠받들고 있는 일왕 스스로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 제동을 걸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10월에도 기미가요와 히노마루 국기를 강제화한 도쿄도 교육위원회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강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도 산케이신문 등은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도쿄/이수지 통신원 buddy-su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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