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음식 폄훼발언 올림픽투표에 영향… 라이벌 英·佛 “끝나지 않은 백년전쟁”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맛없는 영국 음식이 올림픽 유치 실패 소식보다 더 삼키기 쉽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7월7일자 AP통신)
2012년 올림픽 개최지가 7월 6일 접전 끝에 런던으로 결정된 직후 시라크 대통령이 G8 정상회의가 열리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한 것을 재치있게 표현한 것이다.
“핀란드 음식을 제외하면 영국음식이 가장 형편없다” 시라크 대통령이 7월 3일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옛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열린 러·프·독 정상회담에서 영국 음식을 폄훼하는 조크를 한 것은 외교 역사상 가장 큰 말실수로 기록될 것 같다.
그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 중 휴식시간에 담소를 나누다가 “그들(영국)이 유럽 농업에 기여한 것이라곤 광우병밖에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두 정상의 입에서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순간 몇몇 풀기자(대표취재기자)는 귀를 의심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자국 언론인 ‘리베라시옹’을 비롯한 각국 취재진이 주목하고 있는데도 작심이라도 한 듯 계속 말을 했다.
“음식맛이 형편없는 나라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핀란드를 제외하면 영국이 유럽에서 가장 음식 맛이 없다.”
푸틴 대통령이 웃으며 “(미국의) 햄버거는 어떻고요?”라고 묻자 시라크 대통령은 “햄버거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1953년 여름 미국 하버드대학에 몇 달 머무르며 햄버거와 미국을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시라크 대통령은 급기야 스코틀랜드 출신인 조지 로버트슨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 자신에게 스코틀랜드 전통요리 ‘해기스’(양 내장으로 만든 순대 비슷한 요리)를 강권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그때부터 프랑스와 NATO의 관계가 꼬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해기스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조차 스코틀랜드 G8 정상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라크 대통령의 발언은 먼저 ‘리베라시옹’에 소상하게 보도됐으며 영국 언론들은 일제히 시라크 대통령의 발언을 크게 보도했다.
BBC는 요리비평가 이곤 로네이의 말을 인용, “담즙이 많은 사람(시라크를 지칭)은 요리를 품평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꼬집었다. 대중지 선은 “역겹고 좀스러운 ‘인종주의자 녀석(racist creep)’이 우리를 비웃었다”면서 “도매금으로 넘어간 핀란드가 올림픽 유치 투표에서 2표를 갖고 있는 만큼 본때를 보여주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런던에 본사를 둔 로이터통신은 “핀란드와 영국이 ‘음식 악의 축(Food Axis of Evil)’ 국가로 지목됐다”며 도매금으로 같이 넘어간 핀란드 국민들의 분노까지 담았다. 영국인 아내를 둔 핀란드의 알렉산더 스터브 유럽의회 의원은 시라크 총리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영국과 핀란드의 권위있는 재료로 수준높은 음식을 만들 테니 만찬에 참석해달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비꼬았다.
7월 5일 시라크 대통령은 흉흉한 유럽 민심을 뒤로 하고 막판 올림픽 유치전이 뜨거운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파리와 런던이 가장 유력한 개최 후보지로 떠오른 가운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공항에서 시라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국 기자들이었다.
“당신은 로스비프(rosbif)를 좋아합니까?”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로스비프’는 ‘로스트 비프’(roast beef·쇠고기 구이)의 불어식 표현으로 ‘영국 국민’을 뜻하는 은어이기도 하다.
시라크 대통령은 6일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금방 싱가포르를 떠나야 했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파리가 런던에 4표차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라크의 음식 폄훼 발언에 자극받은 핀란드 IOC 위원 2명이 국민감정을 감안해 모두 런던에 표를 던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양자 대결에서 2표가 어느 한 나라에 몰리는 것은 4표 차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핀란드의 2표가 승부를 갈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현지 전문가들은 막판까지도 파리가 런던보다 다소 우세하다고 전망했으며 런던의 승리는 예외없이 ‘대 역전극’으로 받아들여졌다.
스코틀랜드 글렌이글스에 도착한 시라크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주최의 만찬장에서 그를 맞이한 토니 블레어 총리는 둘다 겉으로는 웃는 얼굴이었다. 시라크 대통령은 구운 양고기와 훈제연어 등 전통 스코틀랜드 요리를 사양하지 않고 먹었다.
영원한 라이벌… 총성없는 ‘백년전쟁’시라크 대통령의 요리 폄훼 발언이 정치경력 43년의 노회한 정치인(72세)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은 다소 의외다. 하지만 최근 양국 관계와 역사적인 경험에 비춰볼 때 그리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달 16~17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블레어 총리는 영국의 예산 분담금 환급을 철폐하자는 시라크 대통령의 주장에 맞서 프랑스에 주로 지급되는 EU 농업보조금 문제도 전면 개혁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놨다.
5월말 프랑스에서의 EU 헌법 국민투표 부결로 인해 최대 위기를 맞은 EU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회의에서 예산안에 대해서만은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완강한 자세로 회의 시간 내내 정상들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고 어떠한 합의도 내놓지 못한 채 회의를 끝내야 했다. EU헌법 문제와 같은 건설적인 문제는 논의조차 못했다.
앞서 EU헌법에 소극적이던 영국은 프랑스 국민투표에서 EU헌법 비준이 부결되기 무섭게 자국 국민투표는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대응에서도 EU 주요국가들 가운데 영국만 유일하게 미국에 적극 동조하는 태도를 취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EU헌법 국민투표 부결로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정치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그에게 영국은 ‘눈엣가시’였다.
‘뉴욕타임스’는 7월 7일자에서 “시라크 대통령의 요리 발언은 영국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가 처한 곤경을 영국 탓으로 돌리려는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양국은 중세말기 백년전쟁(1337~1453)을 시작으로 역사적으로도 라이벌 관계였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양국은 유럽 내 국가들 가운데 서로 상반되는 대표적인 사회모델로 대립각을 세워왔다.
프랑스는 사회안전망과 국가의 지원을 골자로 하는 ‘사회국가’의 맏형 격이었고, 영국은 미국과 함께 자유로운 자본교류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중시하는 ‘앵글로 색슨식 시장주의’의 선두주자였다. 프랑스 국민들이 EU헌법에 그렇게 반대한 것도 EU가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시라크 대통령의 발언을 단순히 정상간 농담 따먹기 과정에서의 말실수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BBC 등 영국 언론들은 이번 올림픽 유치전 승리를 두고 블레어 총리를 트라팔가 해전을 승리로 이끈 넬슨 제독이나 나폴레옹을 물리친 웰링턴 공작의 화신으로 치켜세웠다. 지난 5일 트라팔가 해전 200주년을 기념한 영국의 대대적 행사에 참가한 패전국 프랑스의 해군 병사들은 검은 넥타이를 매고 과거의 패배를 곱씹어야 했다.
<국제부/ 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