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의 보복 ‘법의 심판’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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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집단 성폭행 전원 재구속… 무크타르 마이 “이젠 결혼하고 싶어요”

지난 6월 28일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대법원에서는 전세계 언론의 관심 속에 한 사건심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3년 전 남동생의 죄를 대신해 부족 남성들에게 보복 성폭행을 당한 무크타르 마이(33)라는 여인과 관련된 공판이었다.

자신의 변호사 아이자즈 아흐산과 검찰총장 마크둠 알리 칸이 영어로 논쟁을 벌이는 동안 법정 두번째 줄에 앉은 마이는 긴장을 이기지 못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검고 야윈 얼굴에 짙은 갈색 눈을 지닌 이 여인은 펀자브 주 미즈왈라 출신으로 평생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가난한 소작농의 딸이다. 그러나 2002년 발생한 끔찍한 사건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이날 파키스탄 대법원은 국제적인 관심을 의식한 듯 혐의자 대부분을 석방시킨 하급심의 판결을 뒤집고 석방된 13명 전원을 재구속하라고 판결했다. 영국 BBC방송은 이날 그녀가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이 법정에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사건 전말 2002년 6월 22일 펀자부 미지왈라 지방의 부족회의(지르가)는 마이의 남동생 샤쿠르(당시 12세)를 소환했다. 권세가인 마스토이족 사람들은 샤쿠르가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11살짜리 소녀를 겁탈하다 현장에서 적발됐고 이로 인해 불명예를 안았다고 주장했다. 마이 가족들은 샤쿠르야말로 마스토이족 남자들에게 잡혀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부족회의는 처음 샤쿠르와 문제의 소녀를 결혼시키고 이혼녀인 마이를 마스토이족 남자에게 보내라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같은 제안은 마스토이족에 의해 거부당했다. 성폭행죄는 똑같은 성폭행에 의해서만 씻겨진다고 주장하던 마스토이족은 부족회의를 움직여 마이를 부른 뒤 근처 움막에서 집단 성폭행했다. 마스토이족은 다음날, 지역 경찰에 문제가 해결됐다고 통보하고 간통죄로 잡혀 있던 샤쿠르도 풀려났다.

일단락된 듯 보였던 이 사건은 1주일 뒤 다시 불거졌다. 이 마을 이맘(이슬람교 종교지도자)이 금요일 설교에서 부족회의가 저지른 죄를 폭로한 것이다.
마이의 비극은 지역신문을 통해 알려졌고 며칠 지나지 않아 펀자브 남부 도시인 데라 가지 칸 경찰은 진상조사에 돌입했다. 경찰은 1968년에 제정된 파키스탄 형법, 1997년 제정된 반테러법, 1979년 정비된 파키스탄 종교법을 위반한 혐의를 들어 성폭행에 가담한 마을 남자 14명을 전격 구속했다.

마이에 대한 신체검사와 옷 등에 남은 정액 흔적 등을 근거로 1차 공판을 담당했던 반테러 법정은 마이를 직접 성폭행한 남자 4명과 이를 사주한 2명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파키스탄 법에 따르면 성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뿐 아니라 이를 부추긴 사람도 극형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3월 항소심의 시각은 달랐다. 재판부는 사형선고된 이들에 대해 “증거가 부족하고 조사가 잘못됐다”며 5명을 석방하고 나머지 1명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석방 소식은 국제적인 분노를 촉발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마이는 인권단체 등을 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피해자에서 교육가로 변신 “세 가지 선택이 있었어요. 다른 강간 피해여성들처럼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든지, 평생 어둠 속에서 눈물 흘리며 살든지, 그게 아니라면 여성에게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 사회 관습에 도전하는 길이었죠.”

만신창이가 되어 마을사람들의 놀림을 받았던 마이는 한때 자살을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1주일간 고민 끝에 ‘투쟁’을 선택했고 2002년 9월에 열린 1차 재판에서 승리한 뒤 파키스탄 여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선택한 투쟁방법은 여성 교육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올바른 교육을 받아야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마이는 2002년 정부로부터 받은 9400달러의 보상금과 세계 각지에서 답지한 성금 13만 달러를 모아 학교 2곳을 설립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무크타르 마이 여학교’와 아버지 이름을 딴 ‘파리드구자’다. 그녀는 “학교를 세우지 않았다면 내 인생도 끝났을 것”이라며 “학교는 파키스탄 여성의 해방투쟁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책상과 걸상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만큼 열악한 시설에도 불구, 두 학교에서는 약 270여 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 압력 친미 성향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과 파키스탄 정부는 마이 사건으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녀가 일약 국제적 인물로 떠오르면서 파키스탄의 국가 이미지가 훼손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파키스탄 인권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2002년 한 해 파키스탄에서는 803건의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이중 절반이 넘는 434건은 집단 성폭행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피해여성들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 공개되지 않은 사건은 몇 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올 들어서도 한 중년 남성이 딸의 부정을 이유로 잠든 아내와 딸에게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살해했는가 하면, 마을 주민들이 아들의 간통죄를 대신해 엄마와 두 여자 형제에게 ‘나체 행진’을 강요한 사건이 발생해 물의를 빚었다.
무샤라프 정부는 미국의 한 인권단체의 초청을 받은 마이가 출국 신청을 하자 “국가 이미지 훼손”을 근거로 출국을 금지시켰다. 그녀는 현재 24시간 경찰의 감시를 받는 상태다. 정부는 신변보호를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녀가 외국 언론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도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21일 마이를 인터뷰한 BBC 나딤 사이드 기자는 그녀가 집에서조차 사복을 입은 여자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이웃 사람들과 접촉도 차단됐다고 전했다.
마이는 언젠가 결혼하고 여자로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지 자신이 없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파키스탄 전역에서 많은 남자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 결혼하고 싶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내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청혼자들에게 자신의 돈은 앞으로도 전부 학교에 쓸 생각이고 결혼생활도 자신의 고향 미즈왈라에서 하고 싶다고 답장하면 대부분 남자들이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국제부/이상연 기자 lsy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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