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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예술의 세계
(4)도시에 ‘한국의 멋’ 입힌 거리예술가들
1930년대 후반 ‘킬로이 다녀감(Kilroy was here)’으로 상징되기 시작한 거리의 낙서는 그라피티로, 벽화로, 또 거리를 무대로 하는 설치미술로 그 위상이 변화됐다. 비주류이자 하위문화로 취급받던 그라피티는 오늘날 거리가 아닌 미술관과 갤러리에서도 종종 마주친다. 반항적이고 직접적인 자기표현이 가능한, 패스트푸드 같았던 그라피티···
[ 1460호
ㅣ
2022.01.10 ]
(3)저항과 예술의 교차로 한국의 거리예술
한국의 거리예술은 해외에서 상업적 성향이 강해진 그라피티와 1990년대 중후반 힙합 문화와 결합하며 시작됐다. 동시에 외환위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면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부딪힌 젊은이들이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는 기성세대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도구 역할도 탄생의 배경을 같이하고 있다. 그라피티 본연의 저항적인 메시지는 익명성이 주는···
[ 1457호
ㅣ
2021.12.20 ]
(2)스프레이 캔을 든 렘브란트의 질문
거리예술 초기인 1960년대에는 젊고 반항적인 그라피티가 대부분 불법으로 인식돼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아티스트들은 남의 눈길을 피해 야간이나 게릴라적으로 그라피티를 남겨야 했다. 스트리트 아트가 게릴라 아트, 패스트 아트라는 별칭을 얻은 배경이다. 이안 스트레인지의 ‘타깃’ / ianstrange.com 도시에 그라피···
[ 1454호
ㅣ
2021.11.29 ]
(1)도시, 예술가의 캔버스가 되다
1980년대에 이르러 뉴욕의 지하철과 모퉁이를 색채로 물들이던 그라피티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지만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의 거리예술가들이 대중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의 ‘킬로이 여기 있었다(Kilroy was here)’ / 위키피디아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은 자신의 에너지와 창조력이 예술이 되리라고 생각하···
[ 1450호
ㅣ
202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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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총리 한덕수씨에게 드리는 질문
시사 2판4판
쇄신은…여전히…
주간 舌전
“노무현 따라 꼬마 민주당 갔다면…”
오늘을 생각한다
나의 열두 번째 대통령
1980년대 이후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계엄 포고문이 여러모로 나를 떨게 했다.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4시간 동안은 두려워서 떨었다. 열 살 먹은 딸이 울고 있는 옆에서 덩달아 울었다. 그땐 그렇게 살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입에 재갈을 물고 살거나 재갈을 풀고 죽거나, 나야 물고 사는 편을 선택하겠지만, 나보다 40년 늦게 태어난 딸이 나와 같은 성장기를 보낸다는 것이 서러웠다. 계엄이 해제되고 광장이 열리자 나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광야에 선 듯한 고립감에 떨었다. 광장에 나의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유사한 경험의 축적으로 나는 광장 이후 세상에 일말의 기대도 품지 못하는 비관주의자, 어쩌면 현실주의가 돼 있었다. 응원봉과 K팝, 전에 없던 광장의 미담과 남태령에서 날아든 기적 같은 이야기들로 마음이 녹을 만도 한데, 나만이 서 있는 이 광야에서 그저 먼 나라 소식을 보듯 광장을 관망했다. 4월 4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읽어 내려간 윤석열 파면 결정문을 들으며 잠시 감동했지만, 광장이 닫히고 대선 공간이 열린 순간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누구에게는 광장의 연속이겠지만, 나에게는 광야의 확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