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겐 정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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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편집장

이주영 편집장

전 세계에 생중계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공개 설전을 벌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급기야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를 시사하는 메시지를 내놨습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우리(미국) 무기가 없었으면 전쟁은 2주일 만에 끝났을 것”이라며 종전을 압박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를 전면 중지할 것이란 보도도 나왔죠. 굳게 믿던 동맹으로부터 면박을 당한 젤렌스키를 보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웃고 있을 겁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가치 연합, 동맹과의 우호 관계를 강조해온 미국은 이제 없습니다. 21세기에 등장한 제국주의자의 모습에 전 세계인이 놀라고 있습니다.

자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모습을 지켜본 우크라이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젤렌스키 면전에 대고 “당신에겐 카드가 없다”고 했던 트럼프의 말은 슬프게도 사실입니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끝난 사흘 뒤 소셜미디어에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들만의 정장을 갖고 있다’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피범벅이 된 의사의 옷차림, 무너진 건물에서 생존자를 찾는 구조대의 작업복, 병사들이 입은 전투복 등이 3년째 전쟁 중인 그들의 정장이란 의미였습니다. 군복 차림으로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젤렌스키에게 미국 기자가 “왜 정장을 입지 않았나” 묻고 J.D 밴스 부통령 등 배석자들이 무례하게 웃음을 터뜨렸던 데에 대한 항의 표시입니다. 한 우크라이나 여성은 “우리 모두 정장을 입으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인을 죽이는 것을 멈추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약소국 우크라이나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옹졸한 독재자를 연기했습니다. 3년 전에 촬영했는데요. 그때 저는 ‘이거 너무 오버인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제가 너무 조심스럽게 연기했다는 걸 알게 됐죠. 제가 다큐멘터리를 찍었더라고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에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언행을 일삼는 독재자 마셜을 연기한 배우 마크 러팔로가 최근 한 토크쇼에 나와 한 말입니다. 영화배우가 영화가 아닌 다큐였던 것 같다고 할 만큼 영화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상식과 원칙이 허물어지고 믿을 만한 리더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약자의 설움을 겪지 않으려면 각자도생의 길을 갈고닦을 수밖에 없겠다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 주간경향은 조기 대선을 앞두고 중도층 표심을 잡기 위해 재정비에 나선 각 정당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중도보수’ 정당을 선언하면서 시작된 노선 투쟁 움직임과 함께, 지난 대선 이후 지속적으로 ‘우향우’ 해온 민주당의 정책도 짚어봅니다. 이와 함께 한국인의 소득분배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로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가계금융복지조사의 허점을 짚어보고 개선방안도 알아봤습니다. 조만간 결론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쟁점을 총정리하고, 지역소멸 시대에 지역 리더 양성에 나선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도 준비했습니다.

<이주영 편집장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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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