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진수 편집장
지난해 MBC가 방영한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에서 주인공은 누명을 쓰고 10년간 복역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 끝나갈 무렵 마을에서 같은 학교 친구 2명이 죽었는데 주인공은 바로 용의자로 지목되고, 3개월 만에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감옥에서 만기 출소한 주인공은 고향 마을의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가운데 ‘살인을 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웁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건의 살인사건이 연달아 벌어질 당시 주인공은 술을 마시고 잠이 듭니다. 밤새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마셨습니다. 그 시간에 친구를 만났다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고성방가라도 했다면, 온라인 게임에 접속이라도 했다면 그토록 쉽게 누명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주인공은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잤기’ 때문에 10년간이나 교도소에 있어야 했습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고난을 보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중앙선관위도 요즘 ‘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느라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켜 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의 주요 이유로 ‘부정선거 의혹’을 들었습니다. 지난 1월 21일 열린 탄핵 심판 3차 변론에는 직접 출석해 “계엄을 선포하기 이전에 여러 가지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에 의문이 드는 게 많이 있었다. 2023년 10월 국정원이 선거관리위원회 전산 장비의 극히 일부를 점검한 결과 문제가 많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음모론을 제기하는 게 아니라 팩트를 확인하자는 차원”이라고 덧붙였지만, 부정선거 주장은 선관위가 아무리 설명하고 논증하고 반박해도 끝나지 않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음모론’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동안 선거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이의, 의혹 제기가 있었고 대법원이 이를 심리해 기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부정선거 증거자료’를 들고 다니며 여러 언론사에 제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를 진지하게 받아 기사로 쓴 언론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초기 취재단계에서 금방 의혹이 해소됐기 때문입니다.
선관위에 비하면 드라마 주인공은 그나마 사정이 낫습니다. 살인사건 자체는 일어난 것이 명백하고 진범을 잡으면 누명을 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선관위는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이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 계속 설명을 해야 합니다.
주간경향은 이번에 설 합본호로 많은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지난 1월 20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가운데 ‘선장 없는 배’ 신세인 한국의 위기를 다각도로 짚었습니다. 윤 대통령을 축출하기는커녕 함께 음모론에 빠져든 여당 국민의힘 문제도 살펴봤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양자컴퓨터의 상용화 가능성도 분석했습니다. 이렇듯 국내외에 현안이 쌓여 있는데 부정선거 같은 음모론 해명에 더 힘을 낭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