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취임 행사에서 검을 들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일성은 국제사회에 던지는 경고에 가까웠다. “미국의 황금시대는 이제 시작된다”는 선언부터 “(미국이) 더는 이용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까지 모두 ‘미국 우선주의’를 떠올리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미국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선 높은 관세를 뚫든가, 미국에 공장을 짓고 생산하라는 선택지도 국제사회에 던졌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 당시 우대받았던 동맹, 우호국도 예외는 없을 전망이다. 지난 1월 20일(현지시간) 열린 취임식에서 그는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한 25% 관세를 2월 1일에 (부과)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1기-바이든-트럼프 2기로 이어진 미국 정치의 변화는 국제질서 변화의 역사가 됐다. 이익, 거래, 양자주의에 집중했던 세계는 이념, 규범, 다자주의로 이행했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1기 때와 같이 미국 이익에 기반한 ‘선택적 관여’, 힘의 균형을 맞추는 ‘역외 균형자’ 역할에 치중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통적 동맹’의 가치보다 개별 사안에 대한 ‘이익형량’이 미국과의 친밀도를 따질 척도가 될 전망이다.
4년 만에 뒤집힌 국제질서 속에 각국 정부는 기민한 대응에 나섰다. 특히 ‘가치동맹’을 표방하며 국제사회 대립의 최전선에 섰던 한국은 정책 조정이 시급해졌다. 문제는 지난 2년 반 동안 한국을 이념 대결의 최전선으로 이끈 대통령이 변곡점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국회에서 탄핵당한 윤석열 대통령은 최장 180일이 걸리는 법정 다툼을 하고 있다. 국정 공백을 불러온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미국 정권 교체를 한 달여 앞두고 벌어졌다.
바이든과 트럼프 그리고 윤석열
자유주의 국제질서 복원을 내세운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과 “철들고 난 후 자유민주주의라는 신념 하나 가지고 살았다”는 윤 대통령은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바이든 행정부 임기가 중반에 들어설 무렵 출범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미국이 재편한 국제질서 속 우등생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이념, 규범, 다자주의의 열렬한 신봉자로서 중국 등과의 대립에 최전선에 섰다. 한국의 적극적 참여로 완성된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는 미국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이 됐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바이든 행정부 당시 윤 대통령 행보를 두고 “그는 미국의 ‘달링(사랑하는 이)’이었다”고 말했다.

2023년 4월 26일(현지시간)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 국빈 만찬에서 기타를 들고 있다./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은 ‘자유무역’, ‘동맹’을 강조했다. 그런데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뜯어보면 윤 대통령의 생각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마치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연장선 같은 면모가 발견된다. 핵심은 보호무역을 근간으로 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뚜렷한 산업정책을 제시하지 않은 반면, 바이든 행정부는 ‘그린 뉴딜’이라는 산업정책 속에 보호무역을 숨겨뒀기 때문에 달리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대표되는 바이든 행정부 정책에서 외국 기업은 미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대신 미국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 미국에 생산설비를 짓고, 고용을 창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제품 생산에 들어간 원료가 미국이 선정한 우려 집단이 일정 비율 이상 제공한 것이면 안 된다는 조건까지 달렸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관세 정책과 같이 ‘미국에 공장을 짓고, 미국에서 생산하라’로 귀결된다. 정영우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바이든 행정부가 자유무역 복원, 다자주의로의 안정적 복귀를 말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못지않게 보호무역 기조를 보였다”며 “트럼프의 국내정치적 성공 요인이 기업들을 노골적으로 보호하는 무역정책에 있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린 뉴딜’은 기술, 자원, 투자의 미국 집중을 부르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만큼 비난받진 않았다. ‘그린 뉴딜’에 자유민주주의, 동맹과 같은 가치가 한 방울씩 섞여 있었다. 이를 국제사회에서 앞장서서 홍보한 것은 입버릇처럼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윤 대통령이었다. 국제질서, 국제기구, 평화, 기후변화 대응 등을 위해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도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적 부담을 나누어지는 대신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를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계산은 2년 반 만에 끝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 세계보건기구(WHO), 파리 기후변화협약에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파나마 정부 소유의 파나마 운하를 ‘되찾고’, 덴마크의 자치령 그린란드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무력 사용’까지 시사했다. 주권, 규범, 가치 등으로 이루어진 자유민주주의 국제질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 반 동안의 외교정책을 보면 현실이 아닌 환상 속 희망만 좇다 끝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가 깨버린 윤석열 정부의 환상이 또 하나 있다. 윤 대통령이 계엄 선포 원인으로 밝힌 ‘북한 공산세력’을 두고 미국 대통령이 친밀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단순 사실인가, 또 다른 의미인가
“그는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다. 우리는 잘 지냈다. 그가 내가 돌아온 것을 반기리라 생각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식 직후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남긴 말이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뒤에 나오는 ‘뉴클리어 파워’는 핵 권력을 말한다. 이를 연결하면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이 문장은 한국에서 여러 해석을 낳았다. 핵심은 ‘그가 왜 공식석상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칭했느냐’다.

2019년 2월 2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우선, ‘뉴클리어 파워’는 공식 용어가 아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는 공식적으로 핵을 보유했다고 인정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P5(Permanent Five)만을 핵무기 보유국(Nuclear Weapon States)으로 지칭한다. 그 외에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 핵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국가들을 일컬을 땐 ‘사실상’의 핵보유국이라는 의미로 ‘디 팩토’(De facto·사실상의) 뉴클리어 파워라는 말을 쓴다. 이들 국가는 NPT에 가입한 적 없이 핵 개발을 마쳤고, 국제사회의 특별한 제재를 받지 않고 있다. 그런데 P5 국가를 ‘뉴클리어 파워’라고 지칭하기도 할 만큼 해당 용어는 혼재돼서 사용된다. 즉 뉴클리어 파워를 정확히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발화자 본인만 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국내 전문가들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첫째는 단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뉴클리어 파워는 ‘북한이 실체적·현실적으로 핵을 가지고 있다’ 그 정도 의미로 봐야 한다”며 “이를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같은 의미의 뉴클리어 파워라고 하면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 등을 풀어야 하는 등의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북한은 NPT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이력이 있는 만큼 이들 국가와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다르다. 둘째는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북핵 관련 공감대를 형성하고 나온 발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단순히 트럼프 대통령 한 사람 입에서만 나왔다면 즉흥적으로 사용한 단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후보자 역시 청문회에서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로 지칭했다”며 “북한의 핵 보유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핵 보유 관련 지위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합의된 교감 없이 나오기 힘든 발언”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단순히 핵의 존재를 지칭한 것이어도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동안 한·미 양국 정부는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제시했을 뿐 북한이 보유한 핵의 존재, 수준에 대해서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긍정도 부정도 아님)에 가까웠다. 북핵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면 해법 역시 원론적인 ‘비핵화’에서 ‘핵 동결’, ‘핵 군축’ 등으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이른바 ‘스몰딜’ 가능성으로의 전환이다.
핵 동결, 핵 군축으로 전환될까
핵을 스스로 개발해서, 무기로 고도화한 국가 중 이를 자발적으로 폐기한 경우는 아직 없다. 그런데 북핵 관련해서 한국이 원하는 것은 비핵화다. 2019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가 가장 가깝게 다가간 시기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돌아온 트럼프는 임기 4년만을 남겨두고 있다. 한 번 실패한 비핵화보다 4년 이내에 달성 가능한 대응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선택 가능한 첫 번째 가능성은 핵 동결 추진이다. 현 수준에서 더 이상의 핵 개발을 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핵 군축이다. 이미 만들어둔 핵무기, 시설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두 가지를 묶어서 핵 군비통제라고 한다. 핵 동결-핵 군축은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이미 김정은은 핵 동결, 핵 군축 가능성을 모두 보여준 바 있다”며 “2018년 4월 2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고 ‘ICBM 시험 발사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고, 같은 해 5월 24일에는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며 ‘핵 동결’을 했다. 이듬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영변 핵시설 폐기를 대표로 하는 ‘핵 군축’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는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도 핵 동결, 핵 군축을 담은 중간 단계의 비핵화 조치를 제안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한국이 바라는 비핵화는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로 불리는 ‘리비아 모델’에 가깝다는 점이다. 리비아는 핵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북한처럼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거나 군사적으로 활용한 바가 없다. 게다가 이는 이미 2019년 한 차례 실패했다. 한국 정부에게도 핵 동결, 핵 군축이 더욱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지만 이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두 가지 딜레마가 있다. 하나는 북핵을 인정하고 일시적으로라도 수용하는 것은 국내 정치적으로 자해 행위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핵 동결, 핵 군축의 최종 목표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지난 1월 2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A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핵 동결, 핵 군축 자체가 최종 목표인 협상은 한국이 수용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총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스몰딜로 전환한다고 했을 때 핵 군축을 통해 비핵화로 가겠다는 것인지, 핵 군축으로 끝내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며 “완전한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핵 군축은 북핵만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말했다. 홍 위원은 “트럼프 행정부는 비핵화를 목표로 한 접근이 실효성이 없었던 만큼 목표를 바꾸거나, 낮춰 잡는 방식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며 “미국 본토를 겨냥할 수 있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제거하는 선에서 빠르게 마무리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몰딜이든 비핵화든 북핵을 인정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한국이 정치적으로 북핵을 인정하지 않다 보니 최선의 전략이 무엇인지 애매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입장과 별개로 북·미 접촉 가능성은 크다. 조 위원은 “올해 안에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며 “트럼프는 2026년 중간선거 전 성과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북·미 접촉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코리아 패싱’(한국 배제) 가능성도 커진다는 점이다. 임 교수는 “코리아 패싱을 염려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윤석열 정부가 역대 최고 수준의 한·미동맹을 만들었다고 강조를 했는데 미국 행정부가 바뀌자마자 한국이 배제될 상황을 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 리더십에 공백이 있는 상황에서 일정 기간 패싱은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구멍 난 대북정책, 어떻게 수습할까
한국의 외교안보정책이 한·미동맹에 근간을 두는 만큼 한국은 필연적으로 미국의 정치적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양국 선거 일정이 동기화되지 않은 만큼 한국 정부에 필요한 것은 정책 변화의 유연성이다. 지난 2년 반 윤석열 정부는 한·미동맹, 국제공조를 통한 압박을 대북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국제사회가 이익을 좇아 사안 별로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상황에서도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이념대결의 최전선을 지켰다. 그사이 북한은 상호 이익에 기반한 북·러 협력 등 외교적 호기를 맞으며 압박을 빠져나갔다. 같은 시기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도 진행됐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 인식은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확인된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1월 15일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제재가 북한의 핵 개발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향후 대북정책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수 있음을 암시한다. 양 총장은 “트럼프 행정부로 바뀐 이상 윤석열식 대북정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며 “최상목 권한대행은 새로운 외교정책을 펼치는 것을 지양하고,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 위원은 “정권 이익에 북한을 활용하려는 모습이 확인된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굳이 윤석열 정부 동의를 얻고 대북 접촉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설사 정부를 배제한 상태에서 북·미 간 대화가 진행돼도 평화 분위기 조성에 찬성한다는 지지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조 위원은 “만약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 스몰딜에 나선다면 반대를 하되, 미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며 “자체 핵무장, 전술핵 반입,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문제 등을 제시해 보고 최소한 농축과 재처리 권한이라도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