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의 골짜기 진입 우려, 28일 엔비디아 실적 촉각”
“AI 거품론에 리스크 관리· 저가 매수 기회 갑론을박”
올해 국내외 증시를 이끌던 인공지능(AI) 랠리에 급제동이 걸렸다. 미국의 경기 침체 우려 등으로 국내외 주가가 폭락했다. 특히 기술주가 상반기 상승분을 대거 반납하면서 ‘AI 버블(거품)론’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AI 거품론은 AI 서비스의 투자 대비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확산하고 있다. AI 붐을 일으킨 오픈AI조차 수익성 확보에 난항을 겪고 AI 반도체 랠리를 주도한 엔비디아도 차세대 칩의 생산 지연 가능성 등으로 주가가 출렁이고 있다. 업계의 관심은 오는 8월 28일(현지시간) 예정된 엔비디아 실적 발표에 쏠려 있다. 발표 내용에 따라 시장의 의구심이 해소될 여지가 있어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도 엔비디아와 동조화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엔비디아 실적이 단기적인 주가 향방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 “롤러코스터 타는 엔비디아 주가”
미국 뉴욕증시는 반등한 지 하루만인 지난 8월 7일(현지시간) 다시 하락했다. AI 열풍을 타고 주가가 급등한 미 서버업체 슈퍼마이크로 컴퓨터의 2분기 실적이 부진하면서 AI 사업 수익성에 대한 우려로 기술주들이 하락했다. 불안한 투심은 국내 증시로도 이어졌다. 지난 8월 8일 삼성전자(-1.7%)와 SK 하이닉스(-3.4%) 등 반도체 섹터를 이끄는 대형주들의 주가도 떨어졌다. 엔비디아 주가는 이날 전 거래일보다 5.08% 급락한 98.95달러를 기록해 100달러 밑으로 내려갔다. 엔비디아 주가는 전고점이던 지난 7월 11일에서 한 달도 안 돼 20%가량 내렸고, 등락을 반복하며 비트코인 못지않은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같은 날 미국 증시 3대 지수는 1%가량 빠졌는데, 반도체 관련 종목으로 구성된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는 이보다 많은 3% 이상 급락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5일에는 알파벳 등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7(M7)’으로 불리는 대형 기술주 주가가 급락해 이들의 시총이 하루 새 1000조원 넘게 증발했다. 블룸버그통신은 “AI 거품론 확산과 미국 경기 침체 우려 등이 맞물려 기술주가 패닉셀(공황 매도)을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
기술주 급락이 주가지수까지 끌어내리면서 랠리를 주도했던 AI 붐이 식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미국 소비와 고용이 침체하면 AI 투자가 계속될 수 있을지, 실제 수익으로 이어질지 불안감이 커진 것이다. 실리콘밸리 주요 벤처투자사인 세쿼이아캐피털은 지난 6월 보고서에서 “AI에 투자되는 모든 자금을 회수하려면 연간 약 6000억달러(약 817조원)의 매출이 나와야 하는데, 빅테크의 실적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선 AI 산업이 ‘환멸의 골짜기’ 진입을 앞두고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혁신 기술은 기술 촉발, 과도한 기대의 정점과 환멸의 골짜기, 계몽 단계, 생산성의 안정기를 거친다. 가트너는 “AI에 대한 거품이 빠지고 유행이 줄어드는 ‘환멸의 골짜기’ 단계 진입을 앞두고 있다”며 “일상에서 활용 사례가 증가하는 계몽단계를 거쳐 안정기에 도달하는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환멸의 골짜기를 견디는 과정에서 기업 간 옥석이 가려져 새로운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산업을 뒷받침해줄 만한 인프라가 구축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AI 데이터센터 등으로 2030년 미국의 AI 전력 수요는 2023년보다 80배 이상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전력 공급 인프라를 단기간에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미국의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주주 서한을 통해 “AI 사용이 기대되는 분야 중 상당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거나 (환각현상 등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1년 전만 해도 낙관론을 펼치던 골드만삭스도 비관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골드만삭스는 “AI와 오늘날의 기술 구조 등을 고려하면 향후 10년간 혁신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라며 “세상에 쓸모가 없거나 준비되지 않은 것을 과도하게 구축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AI가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는 전망을 반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지금 당장 세상을 바꿀 만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빅테크 업체들이 당장 투자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쟁에서 한 번 뒤처지면, 승자독식 시장을 선점한 업체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7월 실적 발표회에서 “기술분야에서 이런 전환기를 겪을 때 (AI에 대한) 과소 투자의 위험이 과잉 투자의 위험보다 훨씬 크다”고 말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도 “미래 예측은 어렵지만 역량을 확보해두는 것이 낫다”고 했다. 국내 대기업들이 AI 투자를 계속 늘리겠다고 발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빅테크, AI 과소 투자 위험이 더 크다”
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만큼 투자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현기 DB금융투자 연구원은 “미국 경기 부진이 진행될 경우 첨단기술로 이뤄진 제품과 서비스에서도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며 “AI 반도체주에 대해 리스크 관리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비관적인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AI 산업은 인접 산업과의 연계 및 연구가 활발해 개별 기업은 위기를 겪을 수 있어도 AI 산업은 성장을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도 많다. AI 산업에 대한 내재가치가 여전히 견고하다는 의미다. 글로벌 투자은행 HSBC는 최근 주가 급락으로 수익성이 좋은 기업 주식을 싸게 살 기회가 생겼다고 평가했다. 윌렘 셀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지난 8월 6일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기술주에서 거품이 제거된 것일 뿐 AI와 기술 혁신이 더 광범위하게 지속하고 생산성 향상을 계속 이룰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혁 KB증권 연구원은 “최근 주가 하락이 AI 산업에 대한 기대와 현실의 괴리를 좁히는 계기가 됐다”며 “주요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가 기업들의 실적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대규모 투자가 이어질 것이며 이로 인해 반도체주가 수혜를 누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의 관심은 8월 28일 예정된 엔비디아의 2분기 실적 발표에 쏠린다. 엔비디아가 시장 예상을 넘는 2분기 실적과 3분기 전망치를 발표하면 AI 거품론을 잠재울 수 있겠지만, 시장 기대를 밑돌 때는 악재가 될 수 있다. 차세대 AI 가속기인 블랙웰의 설계 결함과 출시 연기에 대해 입장을 밝힐지도 주목된다. 해당 내용은 지난 8월 2일 미국 IT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을 통해 알려졌는데, 엔비디아는 이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