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라는 장르 특성상 관용의 폭이 넓지만, 모든 걸 용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름 무더위를 통쾌하게 날려줄 시원한 코미디라는 호기가 무색하게 영화는 어색함과 민망함 사이의 그 어딘가에서 맴돌다 저 멀리 불시착한다.
오는 7월 31일 개봉하는 한국 영화 <파일럿>의 원작은 모르텐 클링베리 감독이 2012년 발표한 스웨덴 영화 <파일럿>(Cockpit)이다. 여객기 조종사 발레(요나스 카를손 분)는 인원 감축으로 해고당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설상가상으로 아내에게 이혼 통보까지 받는다. 주택담보 대출부터 생활비까지 밀려드는 지출과 생활고에 넋이 나간 그는 다급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입사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데, 우연히 최근 지원한 항공사에서는 여성 조종사를 우대하고 있다는 중요한 첩보를 입수한다.
발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여동생 ‘마리아’의 이름과 성별을 도용한 입사원서를 접수하고 당당하게 합격하지만, 당연히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다.
비교적 한국보다 성(性)에 개방적인 스웨덴인 만큼 다양한 성적 메타포와 풍자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최근 분가한 어머니는 또래 아주머니와 연인관계임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열혈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정치적 집단행동을 주도하던 여동생 마리아(엘렌 마트손 분)는 돈을 벌어다 줄 테니 도와달라는 오빠에게 추가 조건으로 신문 구독을 요구한다.
회사에서 만나 열정을 나누된 여자 동료 세실리아(마리 로베르트손 분)는 초면에 대뜸 양성애자임을 고백하는데, 여성 대 여성으로서 사랑을 키워가던 그는 상대가 실은 남성이었다고 고백하자 주먹을 날린다.
코미디 영화만의 이해와 한계
사실 만든 입장에서나 보는 입장에서나 이번 작품을 향한 기대의 알파와 오메가는 배우 조정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과거 그의 작품들의 성과나 특성들을 봤을 때 이보다 더 합당한 캐스팅은 없다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파일럿>에서 조정석의 개인기는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나마 가치를 부여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면 ‘조정석의 노력’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노력’이 긍정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코미디는 타 장르에 비해 관용의 폭이 넓다. 엔간해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줄 수 있는 허용범위가 넓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누가 봐도 남자인 주인공을 극 중 모든 사람이(심지어 어머니마저) 다른 여자라고 이해하는 어이없는 상황마저도 말이다.
이미 설계부터 무너져 내린 작품을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 할지라도 혼자만의 개인기와 노력만으로 작품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파일럿>은 재확인시킨다.
이 영화가 불쾌한 것은 영화 전체를 관통해 젠더 이슈 또는 남녀 간의 괴리를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게 확대하고 문제화해 부각하고 있지만, 정작 어떠한 대안이나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또는 감히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납득 불가한 인물들의 객기 코미디
이렇게 감당하지 못한 문제 제기의 여파는 결국 등장인물들의 행동 기재나 관계성까지도 납득이 불가한 상황으로 내몬다. 의미 없이 부산스럽기만 한 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하고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보편적 공감을 이끄는데 역부족인 사건들과 갈등의 전개는 극 중 인물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치명적 문제는 중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조연들에게까지도 공평하게 적용된다.
트로트 가수의 열성 팬인 어머니, 뷰티 유튜버를 꿈꾸는 불가해한 정신세계를 지닌 여동생, 소통 노력도 없이 무관심한 남편이라 일갈하며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심지어 블록보다 핑크 바비인형에 눈길을 보내는 어린 아들까지 누구 하나 현실적으로 보이거나 최소한의 공감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도식적 인물들이다.
코미디라는 장르 특성상 관용의 폭이 넓지만, 그래서 모든 걸 용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름 무더위를 통쾌하게 날려줄 시원한 코미디라는 호기가 무색하게 영화는 어색함과 민망함 사이의 그 어딘가에서 홀로 맴돌다 저 멀리 불시착한다.
최근 한국 영화시장의 전반이 침체되고 불안한 때이다 보니 이런 함량 미달 작품들을 목도하기가 더욱더 힘겹고 먹먹하다.
제목: 파일럿(Pilot)
제작연도: 2024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11분
장르: 코미디
감독: 김한결
출연: 조정석, 이주명, 한선화, 신승호
개봉: 2024년 7월 31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드레스를 입은 남자들
비중의 크고 작음을 떠나 여장을 한 남자들이 등장하는 작품의 수는 무수하다.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시리즈를 차치하고 장편영화만 꼽는다고 해도 그 수를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다. 이런 소재의 고전으로 대접받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뜨거운 것이 좋아>(1959)나 시드니 폴락 감독의 <투씨>(1983)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듯, 과거에는 웃음을 유발하는 목적의 ‘일종의 판타지’로서 여성으로 분장한 남성을 희화화했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생계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한국 영화에도 남장여자가 등장하는 작품이 의외로 많았다. 임권택 감독의 <남자는 안 팔려>(1963), 김기풍 감독의 <여자가 더 좋아>(1965), 심우섭 감독의 <남자 미용사>(1968)·<남자와 기생>(1969), 김응천 감독의 <꽃밭에 나비>(1979), 선우완 감독의 <신입사원 얄개>(1984), 한지승 감독의 <찜>(1998) 등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시대가 변화하며 여장남자는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성소수자라는 진지한 담론을 대변하는 일종의 상징처럼 변화했다. <크라잉 게임>(1992), <패왕별희>(1993), <프리실라>(1994), <투 웡 푸>(1996) 같은 영화가 소개되며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해졌다.
장진 감독의 <하이힐>(2014)은 트랜스젠더+필름 느와르+코미디라는 별스러운 조합을 시도해 지금까지도 이상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2017·사진)도 있다. 당시만 해도 주로 독립영화계에서 소소하게 활약하던 배우 구교환을 사실상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든 작품이다.
긴장감과 공포를 유발하는 장치로도 종종 등장한다. <싸이코>(1960), <드레스드 투 킬>(1980), <슬리퍼웨이 캠프>(1983), <인시디어스: 두번째 집>(2013) 등이 대표적이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