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원 바흐닝언 케어팜 연구소 대표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통해 교육과 재활, 일자리 훈련, 심지어는 사회통합에 이르는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케어팜의 기본적인 정의이자 원리입니다. 막연히 농장에서 체험활동을 하니 힐링이 되고 좋았다는 말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조예원 바흐닝언 케어팜 연구소 대표는 지난 12월 6일 서울 삼청동에서 열린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강연에서 케어파밍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돌봄’과 ‘농업’의 합성어인 케어파밍은 농업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치유농업, 돌봄농업, 사회적 농업(소셜파밍), 그린케어 등으로도 불린다. 농업을 활용해 복지와 돌봄을 비롯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을 뜻한다.
농업과 돌봄, 복지가 만난 케어팜
조예원 대표는 네덜란드에서 보건사회학을 공부하다 케어팜을 접했다. 네덜란드는 케어파밍이 가장 발전된 나라로, 1990년대 후반 처음 시작했다. 새로운 소득을 창출하고 싶어한 농업인과 시설의 대안을 찾고자 한 사회복지·시민사회 영역, 농업의 다원화를 장려하려는 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유럽에서도 과거에는 장애인을 요양시설에 평생 가둬놓았죠. 정신보건 쪽에서는 더 이상 이러면 안 된다, 인권을 생각한다면 이분들에게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 다른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어요. 장애인들이 농장에서 지내면서 자존감을 찾고 자립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농업인 단체와 정신보건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정부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정부도 농업을 다각화한다는 측면에서 이 주장을 수용해 1990년대부터 한시적인 지원조직을 만들면서 발전하게 됐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현재 1250곳이 넘는 다양한 유형의 케어팜을 운영 중이다.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케어팜은 보건복지 분야 돌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됐다. 나라마다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벨기에,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같은 나라들은 농업의 다원적 활동이라는 틀에서 접근한다. 이탈리아는 사회통합적 성격이 강한 소셜파밍을 지향한다. 농촌 실업자나 장애인, 약물 중독자 등 사회에서 소외·배제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모아 협동조합을 구성하고, 함께 농사를 짓고 생산물을 판매해 경제활동을 이어가게 한다.
네덜란드 케어팜에서는 주간 돌봄, 중증 청년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교육과 직업훈련 등의 활동이 이뤄진다. 번아웃 증후군을 겪으면서 정신적 치료나 휴식이 필요한 사람도 이용할 수 있고, 학대 아동을 위한 보호시설로도 기능할 수 있다. 참여자들은 동물을 돌보고, 작물을 재배하고, 식사를 준비하거나 청소를 하는 등 농가의 일을 돕는다. 목공 등 취미활동을 하거나 기술교육에 참여할 수 있고, 원하는 때 주변을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탄다. 농산물을 가공·포장·판매하며 직업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
농장의 직업훈련은 사회성과 일상생활 능력을 키우는 시간이다. “농장의 일상적인 농업 활동을 농업인과 함께하는 거예요. 처음 몇년간은 한국분들이 이해를 못 했어요.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힘든 일을 하는데 돈도 안 주고, 노동착취 아니냐는 거죠. 사실 하루에 정해진 만큼 노동을 한다는 개념은 아니에요. 시간에 쫓기면서 노동 효율성을 높여가도록 강요당하는 반복 노동이 아니거든요. 내 속도에 맞춰서 해도 되는 활동이에요. 작게는 산책하면서 지나가다 보는 꽃과 과일을 따거나 동물을 한번 쓰다듬을 수도 있어요. 그 정도만 해도 집과 시설에만 갇혀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건강할 수 있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되죠.”
치유농업법 시행 3년차 맞은 한국
케어팜의 기본 원칙은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야 탈시설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몇시에 일어나 언제 밥 먹을지, 언제 외출할지를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통제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리듬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치매 어르신, 약물 중독자 등 시설에서 지내는 사람도 다르지 않다. “보통 시설에 수용된 많은 사람은 시간표에 따라서 움직이잖아요. 이들은 수용된 인원 중 1명일 뿐입니다. 케어팜은 농장주가 내 이름을 알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지난번에 왔을 때 내가 뭘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줍니다. 심지어 그럼 오늘은 뭘 할까 이렇게 묻기까지 해요. 이런 경험들이 굉장히 좋은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네덜란드 케어팜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도 이런 소규모 돌봄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케어팜에서는 장애인 3명에 직원 1명, 증상이 심하면 1 대 1로 조를 이뤄 활동하니까 충분한 보호와 돌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하나 중요한 원칙은 ‘유용하고 보람을 주는 활동을 한다’이다. “책임을 지워주고 확인함으로써 스스로 성취감과 유용함, 보람을 느끼게 하면 이들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케어팜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지자체 담당 부서, 보건공공기관과 상담한 후 시설 이용 처방을 받는다. 이후 원하는 케어팜을 골라 직접 신청하거나 케어파밍 지역협회를 통해 케어팜을 소개받는다. 개인 부담은 전혀 없고, 농장이 지자체 또는 지역협회에 비용을 청구한다. 비용은 정부의 보건복지 급여에서 충당한다. 국가의 보건복지 제도를 농장에서 활용할 수 있다는 게 네덜란드만의 차별점이다. “농장인데 주간 보호시설이나 요양시설, 장애인시설 등의 법적 지위를 갖고 운영합니다. 이런 곳은 네덜란드가 유일하죠. 농장을 운영하는 분들이 케어팜 비용을 보전받으니 소득 걱정을 덜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장기요양법이나 사회지원법에 따른 예산 지원을 받으려면 전문 인력 등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2020년 3월 ‘치유농업 연구개발 및 육성에 관한 법률(치유농업법)’이 통과됐다. 법 통과로 케어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치유농업사라는 새로운 자격증도 생겼다. 아직 활발하게 운영 중인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치유농업 농장을 운영하는 이들은 운영비를 얻는 데도 힘이 부친다. “체험프로그램처럼 1인당 강사비와 재료비 이런 식으로 비용을 책정하고 운영을 하려니 힘이 들어요. 지속성이 없습니다. 올해는 지원 사업이 있어서 했지만, 내년은 장담할 수 없는 거죠.”
네덜란드처럼 농업과 보건복지 제도와의 결합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개선방안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도 치유농업을 건강보험이나 장기요양보험의 예산으로서 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성과가 없다. 조 대표는 예산을 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의학적 효과를 증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호르몬 수치를 재거나 치매환자의 인지능력을 검사하는 것과 같은 정량적 접근에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치매라는 게 진행성 질환이고 완치가 되는 질환이 아니잖아요. 인지능력 개선도 좋지만 그게 주된 목적이어선 안 됩니다. 시설에 갇히고, 묶여 있는 게 아니라 하루를 더 의미 있고 좀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단기 프로그램 위주의 접근은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서 장애인 프로그램을 2시간 동안 한다고 해서 갑자기 자존감이 좋아지기는 어렵죠. 장기적인 이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건강을 다차원적으로 이해하려는 질적 접근 방식도 필요하다. 조 대표의 내년 연구 목표이기도 하다. “건강의 특정 측면만 보지 않고 신체적·정신적·사회적 건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숫자와 데이터에 집착하는 연구가 아니라 건강의 다른 정의, 개념을 갖고 케어파밍의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를 해보려고 합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