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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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바스 전쟁

영화 <돈바스> 스틸. DAUM 영화

영화 <돈바스> 스틸. DAUM 영화

우크라이나 전쟁이 6개월을 넘겼다. 전쟁에 대한 여러 논란과 함께 국지전을 넘어 21세기 신냉전을 촉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코로나19에서 회복하려던 세계경제는 하락하고, 3세계 빈곤국들은 식량과 에너지 기아 위협에 직면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도 이 전쟁은 ‘고작’ 6개월이 아니다. 2014년 유로마이단으로 국민을 살상하던 정권이 붕괴하고 시민혁명이 성공했지만, 새로운 내전에 돌입하는 국면으로 돌변했다. 소련 체제하에서 우크라이나는 민족주의가 강하고 농업 중심으로 유럽 친화적인 서부와 러시아계가 다수인데다 중공업단지가 러시아와 밀접한 경제권으로 묶여 있던 동부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후 이어진 부패로 중앙정부는 특히 동부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다.

유로마이단으로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자 러시아는 서유럽과 완충지대를 잃어버릴 것이란 위기의식에 빠졌다. 그 결과 동부를 분리해 합병 혹은 친러시아 세력의 분리독립을 꾀했고, 비밀공작이 이어졌다. 먼저 크름(크림)반도가, 그리고 ‘돈바스’라 불리는 동부 접경지대에서 분리주의 세력의 무장봉기가 촉발됐다. 2014년 2월에 유로마이단이 성공한 뒤 불과 수개월만의 일이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주에 ‘노보러시아’라는 미승인국을 세운 분리주의 세력과 공공연히 우크라이나 내에 침투한 러시아군은 아직 정비되지 않은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붙였다. 전열을 새롭게 정비한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민스크 협정으로 불안정한 휴전 상태를 유지하게 됐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2022년 2월은 그저 전면전이 재개된 것뿐인 셈이다.

러시아가 개입한 동부지역

2014년 9월, 민스크 협정 발효 직전의 동부 친러시아 지역에서 무장세력의 공격으로 버스에 탄 민간인이 몰살당한다. 분리주의 세력은 우크라이나군이 반정부적 분위기의 주민들을 학살했다며 적개심을 고취하는 홍보에 여념이 없다. 한편 휴전협정을 앞두고 군 내부에서 평화협상을 방해하기 위해 제5열(스파이) 활동을 벌이는 세력을 색출하기 위해 ‘작전명 반데라스’라는 암호명으로 안톤 대위의 팀을 전선에 파견한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적대적인 주민들에 둘러싸인 채 적과 아군이 뒤엉킨 혼란상이다.

안톤 대위는 실은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동네 출신이다.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제 정부군이 된 그를 보는 이웃들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하다. 부대에선 계속 석연찮은 사건과 내부 파괴공작이 거듭된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첩보전이 이어진다. 부대 군의관이 돌보던 반군 부상병을 체포한 안톤은 그가 어릴 적 친구이자 연적이었던 레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레히는 상부의 명령에 민간인 버스를 공격한 후 죄책감에 숨어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안톤은 러시아가 배후에 있는 반군의 두 번째 민간인 학살 음모와 그 책임을 정부군에 씌우려는 언론공작 계획을 알게 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작전명 반데라스> 포스터. DAUM 영화

<작전명 반데라스> 포스터. DAUM 영화

영화 <작전명 반데라스>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동부를 ‘대테러지역’으로 규정한 상태다. 친서방진영이 우세해진 상황에서 동부지역은 소외되고 탄압받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고, 러시아는 정보공작으로 이를 확산시켰다. 현대전쟁은 미디어를 활용한 전(全) 방위 선전전이라는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런 가운데 지방자치 확대 등 노력을 벌일 틈도 없이 내전의 불길이 오른다. 장기간의 혼란 속에 중앙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데다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밀접하던 동부의 불만을 활용한 분리주의 운동의 어두운 이면이 친정부 시각에서 조명된다. 의외로 국내에서도 해당 유형의 영화들은 적지 않게 수입돼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성과 질서가 무너져가는 참상

<마이단>으로 유로마이단의 중요한 현장기록을 남긴 세르히 로즈니차 감독은 2018년엔 거듭되던 돈바스 전쟁을 다룬 극영화 <돈바스>를 선보였다. 해당 작품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감독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현재까지도 동부 내전의 파괴적 참상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로 남아 있다.

<돈바스>는 일관된 이야기 전개가 아닌 옴니버스 단막극 형태를 취한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큰 연결고리 없이 독자적으로 전개된다. 등장인물이나 사건이 서로 통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거대한 역사화처럼 부분마다 내전의 현실을 부조리극 형태로 신랄하게 풍자한다. 영화에는 분리주의 세력 통제하의 동부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사건이 점점이 등장한다. 어느 장면이나 평화로운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과 도시에는 불안과 궁핍 그리고 공포가 감돈다. 주민들에게 합법적으로 선출된 게 아니라 갑자기 출현한 반군은 정부군과의 대결을 위해 지역사회를 수탈하는 것은 물론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전체 우크라이나의 10분의 1 수준인 이 지역만으로 정부군에 맞서다 보니 강제징집이 거리에서 자행되고 주민들을 철권으로 억압하는 현실이 드러난다.

<임계점: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쟁> 포스터. Amazon.com

<임계점: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쟁> 포스터. Amazon.com

주민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가운데 겁에 질려, 혹은 증오심에 사로잡혀 정부군 포로나 친정부인사에 대한 폭력과 테러를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런 가운데 자연히 적개심과 원한이 깊어져 간다. 이제 이웃과 친지도 서로 믿을 수 없다. 영화 전체를 감싼 연극적 기운은 후반부에 가서 작품 속 현실과 픽션을 뒤엉키게 만들고, 그 서늘한 기운을 통해 관객은 내전이 만든 음산한 풍경을 극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마이단에서 돈바스를 연결한 기록영화

머나먼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 대해 한국인들이 제대로 맥을 짚어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영화 <임계점: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쟁>은 우크라이나 근현대사에서 마이단이 형성되기까지 과정, 그리고 마이단 이후 몇 달간 진행된 러시아의 개입과 분리주의 세력의 발호 상황을 요약 해설해준다. 시민혁명의 승리라는 감격은 잠시, 국가가 분열될 상황에 직면한 정부는 마이단 참가자들에게 입대를 호소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징병에 응한다. 오랜 국가적 혼란은 국방력에도 치명적 악영향을 미쳤고, 동부지역의 반정부 정서 속에 급속도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확산한다.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제대로 기능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의 시위대 동지들은 이제 입장이 갈려 대립한다.

그런 가운데 민스크 평화협정이 조인되지만, 요충지 확보를 위한 전투는 거듭된다. 극영화로는 표현 불가능한 실제 시가전의 참상이 펼쳐지고 반군과 연합한 러시아군의 공세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생생하게 묘사된다. 민주화운동이 국가 존망을 건 전쟁으로 이어지고 그 가운데 새로운 우크라이나 국가 정체성이 싹트는 과정은 감동적이지만, 이어지는 희생을 바라보는 기분은 그저 착잡하기만 하다. 지난 8년간 이어진 국제사회의 방관이 현재의 전면전을 낳은 생생한 증거인 셈이기에.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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