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최면
제작연도 2020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85분
장르 공포, 스릴러
감독 최재훈
출연 이다윗, 조현, 김도훈, 남민우, 김남우, 손병호, 서이숙
개봉 2021년 3월 24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배급 ㈜스마일이엔티
한국에 저런 책이 출판된 적 있던가. 영화 속 대학 도서관에서 주인공이 빌리는 두툼한 하드커버 책의 제목은 <최면>이다. 영화에서 해당 책이 등장할 때마다 꼼꼼히 보니 저자는 최재훈으로 돼 있었다. 이 영화의 감독. 출판된 적 없는 가상의 책이다. 오랫동안 미술감독으로 활동해온 감독은 지난해 <검객>이라는 영화의 각본과 감독으로 연출데뷔를 했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몽타주-이미지의 충돌이다. 화려한 나비가 얼어붙고, 장미가 피고 진다. 꿈틀거리는 벌레와 유리조각은 나비나 장미의 환유보다 직설적이다. 얽히기 싫은 것. 끔찍한 기억과 속박. 그런데 동명의 영화가 있지 않았나. 구로자와 기요시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막상 찾아보니 <최면>(1999)을 연출한 이는 오치아이 마사유키였다. 녹색 원숭이라는 암호를 트리거로 최면 암시가 작동해 기이하게 사람들이 죽어가는. 구로자와 기요시를 떠올린 건 연출 스타일에서 역시 최면을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큐어>(1997) 같은 영화가 생각나서 일 듯싶다.
최면을 소재로 한 심리스릴러물
영화의 주인공은 경기도 소재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인 도현(이다윗 분)이다. 과대표를 맡고 있는 도현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교수의 말도 잘 듣는 학생이다. 교수는 편입생 1명을 소개하며, 학교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라고 부탁한다. 이 학생은 이 대학 의과대학에서 최면치료를 받는 학생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따라갔던 도현은 전생인지 어릴 적 기억인지 아주 기분 나쁜 장면을 기억해낸다. 한편 잘 나가던 아이돌 현정(조현 분) 역시 도현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최면을 받은 뒤부터 잊어버린 어린시절 친구 승우의 환영을 본다. 결국 그는 투신자살하고 도현의 친구들은 모두 저주에 시달리게 된다. 어느 날 문득 돌아온 가해의 추억?
이쯤 되면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7)처럼 하이틴 호러무비인가 싶지만, 주인공 무리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죽은 현정과 도현이 대학교의 서클룸 같은 데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저들은 그러니까 서클 친구인가, 라고 생각했다가 도현이 술자리에 선생님으로부터 부탁받은 편입생을 데리고 가는 걸 보면 영문과 동기들인가 헷갈리기도 한다. 이들이 어린시절 교회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함께 보냈다는 사실은 영화의 중반 이후에 드러나는데, 뭐 한국이 일본 가큐슈인 학원처럼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논스톱으로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그렇다 치자. 영화의 막판에는 또 하나의 반전이 나온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이 퍼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실행자는 통제 불가능한 우연적 요소를 돌파해내야 한다. 그 가해자들이 나이가 먹도록 서로 뭉쳐 다녔고, 또 영문과에 진학할 것은 어떻게 미리 알아내 대처할 수 있었을까. 개인정보라 제공할 수 없다는 보호감호소의 간부 책상 앞엔 왜 하필이면 중요한 단서가 될 기념사진 패널이 놓여 있는가(가족사진을 놓아두었다면 또 몰라도, 재소자와 후원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기념할 것은 또 무엇인가).
고등학교가 배경이었다면 어땠을까
앞서 구로자와 기요시를 거론하기는 했는데, 이런 친구들을 괴롭히는 ‘크리처’(사연이 어쨌든 괴물이다)의 외형이나 행동은 영화 <링> 시리즈의 저주 테이프에 편집된 방호대피를 지시하는 남자를 참조했거나, 여느 호러게임에서 한 번쯤은 본 캐릭터 같은 모양새다. 연출력보다는 애초에 영화의 각본단계에서 핍진성 부족을 해결하지 못했다. 차라리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이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배경이었다면 어땠을까. 삼수생이 죽는 장면. 그는 한밤중에 강의실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공부하다가 어디 실험실에 가서 스스로 펄펄 끓는 화학약품에 머리를 담그고 죽는다. 코로나19 국면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대학에 저런 식으로 자습하는 공간도 없고, 아무도 없는 데 위험물질을 저렇게 방치하는 이과 랩도 없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인데, 별로 좋은 평을 남기진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하다. 다음 작품에서는 좀 더 분발하길 바란다.
오랫동안 미술감독으로 활동해온 감독은 지난해 <검객>이라는 영화의 각본과 감독으로 연출데뷔를 했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몽타주-이미지의 충돌이다.
최면으로 사람의 의식을 조종해 살인하게 한다던가, ‘좀비’마냥 본래의 의식을 억누르고 다른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지알로 영화들 이래로 범죄·스릴러 장르에서 많이 채택돼온 소재다. 그런데 실제 최면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김영우 박사는 책 <전생여행>(사진)에서 최면으로 인한 전생퇴행이 그 사람이 현재 겪고 있는 심리적 난관, 콤플렉스 등을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의 실험인데, 최면 상태에서 전생에 대한 사람들의 묘사가 실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지속적 탐구다.
아쉽지만 최면으로 트랜스 상태에 들어간 사람들이 진술하는 전생묘사 등이 실제 역사 속 장삼이사의 경험과 일치한다는 확증은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 나온 적은 없다. 본인이 전생에 역사적 인물이었다고 구술하는 경우도, 구술 내용은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 머물거나 입증 내지는 검증 불가능한 수준의 진술만 확보돼 있을 뿐이다. 유튜브 같은 곳을 보면 최면에 들어간 셀럽이 전생에 북한에서 굶어죽은 병사였다라고 한다든가-그것도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생전 안 써본 말투를 쓰는 등의 신기한 경험을 나열하는 식이 많긴 하는데, 당사자를 만나 그때의 경험에 대해 물어보면 신기한 경험이긴 하지만 스스로도 정말 그게 자신이 겪었던 전생으로 믿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최면의 효용성과 관련해 잘못 알려진 상식이 있다. 흔히 최면 상태에서 나온 진술이 법정에서 유력 진술로 받아들여졌다는 예가 많이 거론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포렌식의 영역에서 최면이 수사의 보조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으나 사건과 관련한 새로운 단서를 찾는 데서만 사용될 뿐 법정에서 증거효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만이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