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권력투쟁의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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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탐색]치열한 권력투쟁의 수단

조선 궁궐 저주 사건
유승훈 지음·글항아리·1만6000원

연산군의 폭정을 잉태한 것은 저주상자였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여러 명의 후궁을 두었다. 왕비와 후궁들 간의 권력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성종 8년인 1477년 성종의 부친 덕종의 후궁이었던 권숙의에게 의문의 상자가 하나 배달됐다.

상자에는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소용이 저주로 중궁(왕비 윤씨)과 원자(훗날 연산군)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와 비상(독약) 등이 들어 있었다. 정희왕후(성종의 할머니)는 이 사건의 배후로 정소용을 의심했지만, 윤씨가 스스로 꾸민 일이라는 게 드러났다. 이 일을 시작으로 성종의 눈밖에 난 윤씨는 결국 사약을 받는다. 시간이 지나 윤씨의 죽음은 연산군의 피의 숙청으로 되돌아왔다. 윤씨가 사약을 받은 일에 연관된 신하들은 대역죄인이 되어 숙청됐다. 갑자사화다.

갑자사화 외에도 조선에서는 나라를 뒤흔드는 저주 사건이 줄곧 이어졌다.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여러 문헌을 검토해 조선 궁궐에서 발생한 9건의 저주 사건을 분석했다. 권력투쟁의 장인 궁궐에서 저주는 빈번한 일이었고 유효한 권력쟁취의 수단이었다. 효종 대에는 3개월에 걸쳐 저주물을 청소하기 위한 창덕궁과 창경궁의 수리가 이뤄질 정도였다. 이때 왕이 생활하는 전각을 비롯해 길과 계단, 문 주위에서 사람의 뼛가루, 턱뼈, 두개골, 동물 뼈와 사체 등의 저주물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갑자사화처럼 저주와 그로 촉발된 저주 사건으로 궁궐과 조정 사람들은 숱하게 죽어나갔다. 국가적 피해도 상당했다. 성리학의 나라, 공적으로 유교를 숭상한 조선이었지만, 공적 정치의 이면은 혼탁하고 은밀했던 것이다. 저주는 단순히 미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쟁자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다.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고 꼼수를 부려 권력을 차지하려는 욕망”이 빚은 참극이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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