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치유의 정치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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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탐색]트라우마 치유의 정치적 역할

몸은 기억한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제효영 옮김·을유문화사·2만2000원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의 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놀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트라우마는 이 사회 참여 시스템을 망가뜨려서 협력하고 보살피는 능력, 사회에 유익한 구성원으로 기능하는 능력을 저해한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현재를 살지 못한다.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멈춰 과거 속에 묶여 반복해서 그 일을 경험한다. 지은이는 트라우마는 몸에 새겨지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몸이 그 상처를 기억해 반응한다는 것이다.

책은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 경험에 어떻게 대처하고, 그 일을 겪은 후 어떻게 생존하고 치유되었는지 30여년간 연구한 결과를 담고 있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이 뇌의 구조와 기능을 바꾸고, 심지어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줄 유전자에도 영향을 준다. 트라우마에 대한 논의는 제대한 군인들이나 테러사건의 희생자들 등 끔찍한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만 집중된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트라우마는 그보다 훨씬 규모가 방대한 공중보건 문제라고 말한다. 그래서 트라우마 문제를 말하게 될 때마다 정치적인 부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를 정치와 분리하게 되면 근본 원인은 제거될 수 없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유전정보보다 생활여건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소득수준, 가족구조, 사는 집, 고용상태, 교육기회에 따라 트라우마 스트레스가 발생할 위험성은 물론이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유용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 빈곤, 실업, 열악한 학교환경, 사회적 고립, 마음만 먹으면 총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환경, 평균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주거환경과 같은 요소들은 모두 트라우마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치유과정도 정치와 분리할 수 없다.

성공적인 트라우마의 치유는 개인의 주체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훌륭한 인물의 성장은 트라우마의 극복으로 가능했고, 한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 또한 그 사회의 트라우마를 계기로 얻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가 폐지됐고, 대공황 이후 사회보장제도가 신설된 것이 그 예이다. 트라우마에 잘 대처하는 것에 공동체의 미래가 달려 있는 셈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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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