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해산… 케케묵은 칼로 ‘민주주의 목’을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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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매년 11월 말을 기준으로 ‘디딤돌 판결’(최고의 판결)과 ‘걸림돌 판결’(최악의 판결)을 선정한다. 민변이 2015년 올해의 걸림돌 판결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선정했다. 민변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자유와 다원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공개한 것”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헌재가 최악의 판결로 혹평 받은 것은 1988년 9월 1일 헌재 창립 이래 처음일 것이다. 1987년 6·10 시민항쟁의 결과물인 제6공화국 헌법으로 탄생한 헌재는 ‘유신헌법 긴급조치 위헌’ ‘법률안 날치기 통과 위헌’ ‘동성동본 혼인금지 위헌’ 등 기본권 보장과 민주주의 신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헌재는 최근 소장의 특정업무경비 횡령 등으로 물의를 빚더니 급기야 최악의 판결 당사자로 지목됐다.

위기의 국정원 살린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헌재가 언론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사건이다. 이는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김성태 미디어학부 교수)가 빅데이터 업체에 의뢰해 헌재 설립 이후 언론 보도와 트위터 등 1억건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2위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3위는 간통죄 폐지 결정, 4위는 신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 5위는 인터넷 실명제 위헌 결정) 헌재가 창립 이래 가장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결정이 곧 최악의 판결로 꼽힌 것이다.

헌재는 지난해 12월 19일 통합진보당에 대해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해산시켰다. 정당해산은 우리 헌정사에서 1958년 2월 25일 이승만 정권이 ‘평화통일론은 북괴의 남침 구호’라는 이유로 진보당을 해산하고, 정적 조봉암을 사형에 처한 이후 처음이다.(그러나 2011년 재심에서 조봉암은 억울한 누명으로 법살(法殺)됐음이 드러나 국가는 상당액을 유족에게 배상해야 했다.)

1년 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정당성 논란에 휩싸여 있는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1년 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정당성 논란에 휩싸여 있는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선 앞서 맥락부터 파악해야 한다. 국정원은 2013년 4월 30일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윤석열 팀장)으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하고 원세훈 전 원장이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8월 22일 국정원이 수사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 조작으로 드러나 무죄가 선고됐다. 특히 이 사건에서 외교문서를 조작하고 남매의 정까지 악용한 것으로 드러난 국정원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8월 5일 공안검사 출신으로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김기춘 비서실장이 임명됐다. 그리고 20여일 후인 8월 28일 새벽 6시30분, 국정원은 진보당 전·현직 당직자에 대해 전격 압수수색을 시작했다. 이튿날 한 언론은 진보당 일부 당원이 지하 혁명조직 RO(아르오)를 만들어 경찰서, 통신·유류시설을 파괴하기로 모의했다는 녹취파일을 공개했다. 이른바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이다.

대부분 언론은 이를 검증 없이 확대보도하면서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온통 나라가 내란음모 위기로 들썩거렸다. 위기에 몰렸던 국정원은 180도 회생했다. 국정원은 수사착수부터 헌법과 형사소송법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 “허위로 영장을 고지하는가 하면 영장을 제시하더라도 자세한 설명이 따르지 않았다. …이는 압수수색이라기보다 주거침입 성격이 짙다.”(<아무도 우리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소위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인권침해 보고회, 2014.2.12)

헌재 뒤뜰에 있는 헌법의 수호자 동상.

헌재 뒤뜰에 있는 헌법의 수호자 동상.

11월 5일 정부는 통합진보당 해산을 헌재에 제소했다. 정부는 통합진보당 해산 신청에 대해 독일이 정당을 해산한 전례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독일이 독일공산당에 정당해산 신청을 제기한 것은 냉전 시기인 1951년이다. 게다가 헌재는 이를 5년간 심리 끝인 1956년 해산을 결정했다. 냉전시기에 있었던 독일의 이 정당해산 사례는 최근 유럽인권재판소 판례에 비추어 다른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정당민주주의와 정당해산 국제학술회의-독일 아데나워 재단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공동주최. 2014.10.28)

정부는 국제적으로 거의 사문화되고, 우리도 55년 전에 단 한 번, 그것도 재심을 통해 정치 탄압으로 판명난 정당해산의 칼을 뽑은 것이다. 게다가 헌재는 많은 ‘이례적’ 사례를 기록하면서, 1년 만에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헌재는 민사재판을 준용, 신속히 심리에 착수했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에서 8대 1로 정부의 해산청구를 인용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에서 8대 1로 정부의 해산청구를 인용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심판관 8명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한편 헌재 결정의 기준인 이석기 내란음모 재판은 유일한 증거인 녹취록이 ‘전면전은 안 된다’는 대목은 ‘전면전이야, 전면전’으로, ‘통일적 대응’은 ‘폭력적 대응’ 등 ‘의도적’으로 조작된 곳이 무려 450곳 이상이나 된 것으로 드러났다.

1심에서는 내란음모 사실을 인정했지만, 2심에서는 RO의 실체는 없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는 무죄가 선고됐다. 대신 문제의 강연이 내란선동이라고 판단했다. 많은 법조인들은 ‘급박하고 실제적 위험’이 없는데도 내란선동 혐의을 적용한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시민·사회단체도 비상원탁회의를 구성해 항의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정당해산의 이유였던 ‘내란음모’가 없다는 2심 판단에도 불구하고 헌재는 9명의 헌법재판소 심판관 중 8명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이재화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RO의 존재가 부정되자 정부는 RO에서 ‘민혁당 잔존세력’으로 바꾸었고, 헌재는 ‘주도세력’이라는 정체불명의 개념을 내세워 통합진보당을 해산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정당해산 여부를 좌우하는 이석기 의원 등의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 최종 판결 결과를 보지 않고 판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헌재에서 정당해산 결정이 내려지자 권영국 변호사가 법정에서 소리를 질러 쫓겨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헌재에서 정당해산 결정이 내려지자 권영국 변호사가 법정에서 소리를 질러 쫓겨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헌재는 또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문제도 정당해산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대검 공안부 수사 결과 문제의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경선부정과 관련해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2012년 11월 15일 대검공안부 보도자료>. 2013년 4월 2일 채동욱 검찰총장 후보자도 인사청문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고, 개별적으로 부정투표를 하였지만 주모자가 없었다”고 증언했다.<검찰총장후보자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41쪽>

17만5000쪽의 재판기록을 다 봤는지도 의문이었다. 헌재 재판연구원을 지낸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증거들을 시간에 쫓겨서 대충대충 훑고 지나가면서 그것을 대충 인정해 버리고 숨은 목적을 인정해 버리는 것, 이게 과연 법치주의적인 입증이라고 볼 수 있는지 개탄스런 결정”이라고 말했다.(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한 한상희·정태호·이재화 좌담-‘대한민국은 입헌주의의 갈라파고스 섬이 됐다’ 2015.1.13)

박한철 헌재 소장이 진보당 해산을 결정하자 현장에 있던 권영국 변호사는 “민주주의를 살해한 날이다,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외치다 경비원들에 의해 입을 틀어막히고 끌려 나갔다.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는 “유태인들을 집단수용소에 감금하고 처형까지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고 재판관들이 히틀러의 비상조치법에 동의했기 때문”이라며 헌재를 나치독일의 최고 재판관에 비유했다.

2014년 12월 2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따른 비상원탁회의가 열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4년 12월 2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따른 비상원탁회의가 열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헌재 결정에 대해 참여연대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동의할 수 없으며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치명상을 입힌 데 대해 규탄한다”며 “헌법재판소가 사회적 다양성과 상대적 세계관을 인정하고 다양한 이념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정면으로 부정했다”고 비난했다. 이밖에 ‘국민주권과 정치적 자유를 유린한 사법쿠데타’(민주노총) ‘대한민국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사법살인’(민변) 등 헌재를 비판했다. 세계 언론도 대부분 ‘우려’하는 논조로 보도했다. 은 “한때 군부독재를 겪은 한국에서 또다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어떤 것이 내란 음모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일으켰다’, 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지킬 의지가 있는지에 심각한 의문이 든다’고 전했다.

헌재 결정 부당성 지적하는 움직임들
소수의견으로 유일하게 통합진보당 해산에 반대한 김이수 재판관은 “근자에 이르러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몇 가지 징표들이 나타나는 상황”이라며 “(통합진보당 해산이) 꾸준히 진전된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 우리 사회의 균형을 위한 합리적인 진보의 흐름까지 위축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탁월한 혜안이고, 대단한 용기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내려진 지 1년이 됐다. 그 사이 헌재 결정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국제 앰네스티는 지난 2월 <2014·2015 연례인권보고서>에서 이석기 전 의원의 실명을 명기하고, 내란선동 유죄를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 대표적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대한민국에서의 인권의 후퇴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또 미 국무부는 <2014년 연례 인권보고서>에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에 대해 ‘자의적 구금’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12월 10일 세계 인권선언의 날을 맞아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한국구명위원회’(이석기 구명위)는 유엔자유권위원회에 자유권 규약 제19조(표현의 자유) 위반으로 진정을 제기했다. 이석기 구명위에는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유시경 대한성공회 교무원장, 정진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소장, 퇴휴 스님(실천불교 전국승가회) 조순덕 민가협 회장,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등 종교·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새로운 사법적 판결도 속속 나오고 있다. 11월 25일 전주지방법원은 헌재 결정으로 도의원직을 박탈한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재화 변호사는 “헌재 결정에 따라 타의로 당적을 이탈한 비례대표 의원에게 공직선거법 제192조 제4항의 당연퇴직 사유를 적용할 수 없다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사유로 의원직을 잃은 광주(광역의원), 여수·순천·해남(이상 기초의원) 의원들도 의정활동에 복귀하고 있다.

1988년 헌재가 들어선 서울 재동은 구한말 우의정으로 개화를 주창한 박규수 선생의 집과 선교의사 알렌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종합병원 광혜원(제중원)이 있던 곳이다. 또 경기여고, 창덕여고 등 여성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바로 그 자리에 수령 6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백송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재동백송은 바로 조선의 개화와 해방·민주화·기본권 수호 등을 말 없이 지켜봤다.

통합진보당 소송대리인단 김선수 대표변호사는 헌재 해산심판 당시 “헌재 대심판정 입구에 있는 수령 600년 백송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늘 이 재판의 결과를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라고 변론했다. 그리고 진보당 해산 결정이 내려진 후 그는 “헌재의 백송은 후세에 매카시즘의 광기 어린 판결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고 전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진보당 해산결정, 무엇이 문제인가?> 도서출판 말, 2015)

재동백송은 12월인데도 불구하고 푸른 솔잎을 여전히 뽐내고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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