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경찰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경상북도 경찰청에서 보낸 것이다. 고발한 사건의 진행 상황 통지서가 들어 있었다. “귀하께서 해병대 1사단장 등 8명을 고발한 사건은 현재까지 계속 수사 중에 있습니다. 엄정하고 신속하게 수사 후 그 결과 통지하겠습니다.” 고(故) 채 상병 사망 사건의 책임을 물어 임성근 전 사단장 등을 대상으로 작년 8월 18일에 고발장을 냈는데 똑같은 내용의 편지만 주기적으로 받고 있다. 8개월째 ‘신속’하게 수사한다는 허풍만 듣고 나니 ‘엄정’하게 수사한다는 말도 의심스러울 뿐이다.
채 상병이 사망에 이르는 과정은 이미 해병대수사단이 사건 초기 상세히 수사해둔 내용이 기록에 면밀하게 담겨 경찰에 이첩된 지 오래다. 관련자들을 소환하고 진술을 청취해 법적인 판단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경찰은 지금껏 임성근 전 사단장을 소환조차 한 적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은 눈치를 보고 있다. 검찰에 송치하자니 대통령실 눈치가 보이고, 불송치하자니 국민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몇 달 지나면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1년이 된다.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겠다며 사건 발생 사흘 만에 순직, 추서, 훈장 수여까지 순식간에 결정했던 정부가 사고 원인 진상 규명 단계로 넘어가니 태도가 돌변했다.
제도의 공정성은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시간의 균질성으로 담보된다. 그러나 ‘국가의 시간’이 권력을 사유화한 위정자들의 필요에 따라 엿가락 마냥 제멋대로다.
그사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사망 책임자를 수사하고 기소해야 할 국가권력은 느닷없이 수사를 맡았던 박정훈 대령을 항명죄로 입건하더니 신속하게 압수수색과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기소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편 업무상과실치사죄로 입건된 임성근 전 사단장은 무보직 상태로 정책연수를 발령받고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 가며 한가롭게 언론인들에게 자기 변론을 담은 e메일을 거듭 발송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정책연수를 명받은 그는 육사엔 가지도 않고 출퇴근 시간이 길다는 핑계로 집 앞 해군 사무실로 출근한다. 자신에게 왜 업무상과실치사죄가 적용될 수 없는지를 핵심 주제로 ‘연구’를 한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다. 임 전 사단장은 대통령실에 로비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전직 국방부 장관은 수사외압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드러나자 출국 금지 상태에서 호주대사에 임명돼 신임장도 받지 못한 채 헐레벌떡 출국하더니, 선거 판세가 불리해진 여당 대표가 호출하자 귀국해 한 달 만에 사임했다. 얼마 전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이종섭 전 장관에 대한 공수처의 수사가 ‘정치공작’이라며 선거 개입, 정치질이라고 비난했다. 이 전 장관은 공수처 수사가 늦어진다며 유감을 표했다. 수사를 방해하며 수사가 늦어진다고 유감스러워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이 나라가 채 상병의 사망 원인을 규명할 시간이 부족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라 생각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제도의 공정성은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시간의 균질성으로 담보된다. 그러나 어딘가에선 전광석화로, 또 어딘가에선 세월아 네월아. ‘국가의 시간’이 권력을 사유화한 위정자들의 필요에 따라 엿가락 마냥 제멋대로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