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은 미약했으나 결과는 창대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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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프로야구 트래프트에서 김현수의 이름은 끝까지 불리지 않았고, 신고선수로 겨우 두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2군에서 1년을 보낸 뒤 교육리그에서 김경문 감독의 눈에 띄어 1군에 발탁되는 기회를 잡았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그는 메이저리거로 우뚝 섰다.

2015시즌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별명은 ‘화수분’이다. 화수분은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 설화 속의 단지를 뜻하는 말인데, 두산에는 뛰어난 선수들이 계속해서 배출된다는 것에서 ‘화수분 야구’라는 말이 나왔다.

두산 화수분 야구의 대표격에 해당하는 선수가 김현수다. 통산 타율 3할1푼8리, 2008년과 2009년에는 타율 3할5푼7리를 기록했다. 2008년에는 타격왕을 차지했다. 명실상부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다. FA 자격을 얻은 김현수는 미국 메이저리그를 노크했고, 12월 17일 볼티모어 지역 언론들은 볼티모어가 김현수와 2년 700만 달러에 입단계약에 합의했다고 전했다.

11월 4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5 서울 슈퍼시리즈’ 한국 대 쿠바의 친선 개막경기에서 김현수가 타격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11월 4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5 서울 슈퍼시리즈’ 한국 대 쿠바의 친선 개막경기에서 김현수가 타격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청소년대표 중 유일하게 지명 못 받아
성공가도를 달린 김현수지만, 출발부터 화려한 것은 아니다. 김현수는 아예 프로야구 선수가 되지 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신일고 3학년 때였던 2005년 김현수는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대표선수였다. 당시 대회 기간 중에 이듬해 프로야구에서 뛰게 될 신인 선수를 뽑는 드래프트가 열렸다. 청소년 대표였으므로 내심 상위 라운드 지명이 기대됐다. 롯데가 김현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던 터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드래프트 중계방송이 없었고, 포털 사이트를 통한 인터넷 문자중계로 지명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대회에 참가한 대표선수들이 PC방에 모여 중계를 지켜봤다. 김현수에게 관심을 두고 있던 롯데는 3라운드에서 김현수와 같은 외야수인 김문호를 선택했다. 그리고 김현수의 이름은 마지막 순간까지 불리지 않았다. 당시 대표선수 중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선수는 딱 2명. 김현수와 나중에 국가대표 에이스가 되는 김광현이었다. 그런데 김광현은 당시 2학년이었다. 드래프트 대상이 아니었고, 결국 대표선수 중 유일하게 김현수만 지명을 받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입시로 치자면, 불합격 통보를 받은 셈이었다.

김현수는 숙소로 돌아와 방에 누웠다. 그때 숙소 방에 누워서 본 천장이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김현수는 “당시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생생하게 겪었다”고 했다. 뒤늦게 롯데와 LG, 두산이 김현수를 신고선수로 데려가기 위해 영입전을 치렀다. 롯데는 당시 신고선수로는 이례적으로 계약금을 제안하기도 했다. LG 출신의 신일고 정삼흠 감독은 김현수에게 LG행을 권했다. 그러나 김현수는 두산을 선택했다. 롯데에는 자신과 포지션, 스타일이 겹치는 김문호가 있었고, LG는 당시 쟁쟁한 외야수들, 게다가 왼손 외야수들이 넘쳐나던 상황이었다. 당장의 내일보다는 미래를 고려했고, 김현수는 2~3년 안에 주전을 노려볼 수 있는 두산을 선택했다.

정식 선수가 아닌 신고선수는 계약금도,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다. 김현수는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했지만 훈련량이 곧장 1군 무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선수들이 신고선수 1년 만에 구단에서 방출된다. 신인왕을 거쳐 리그 MVP에 오른 서건창 역시 LG 신고선수 입단 1년 만에 방출됐다.

여기서 운명적인 우연이 벌어졌다. 김현수는 2006시즌을 2군에서 보낸 뒤 그해 가을 일본 미야자키 교육리그에 참가했다. 유망주들을 위한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다. 구단 감독들이 교육리그를 직접 참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마침 그해 두산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두산은 승률 5할1푼2리를 기록하고도 KIA에 1경기 차이로 뒤져 5위에 그쳤다. 가을야구를 안 하다 보니 당시 두산을 이끌던 김경문 감독이 마땅히 할 일이 없었고, 교육리그를 한 번 가보게 됐다. 그곳에서 김현수가 감독의 눈에 띄었다. 만약 두산이 그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면 미래의 간판타자가 될 김현수의 발탁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연이 기회를 가져다 주지만,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성공은 없다.

김경문 감독은 이듬해인 2007년 김현수를 개막전 엔트리에 넣었다. 1차전과 2차전에는 경기에 나설 기회가 없었다. 김현수는 ‘아, 이제 2군에 내려가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3차전에 갑자기 3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하게 됐다. 물론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현수는 첫 두 타석에서 모두 내야 땅볼을 때리고 물러났다. 두 번째 타석에서 또 내야땅볼을 친 뒤 풀이 죽어 있을 때, 김경문 감독이 조용히 김현수를 덕아웃 뒤로 불러냈다. 김현수는 당시 “크게 혼나는 줄 알았다”며 긴장했지만 김 감독은 혼을 내는 대신 김현수의 두 손을 쥐고 “괜찮아, 자신있게 쳐”라고 말했다. 김현수는 결국 세 번째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냈다.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만들어낸 적시타였다.

메이저리그가 주목한 ‘공 맞히는 능력’
기회를 결과로 만들어내는 것은 노력과 함께 그 노력의 결실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와 격려다. 이후 김현수는 팀의 중심타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자신의 첫 시즌에서 2할7푼3리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그해 가을 두산은 한화와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큰 경기 경험이 없는 김현수를 두산 김경문 감독은 1차전부터 2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시켰다. 1차전에서는 2타수 무안타·삼진 1개에 그쳤지만 김현수는 2차전에서 4타수 3안타와 함께 자신의 데뷔 첫 포스트시즌 홈런을 기록했다. 신고선수였던 김현수가 명실상부한 두산의 중심타자가 되는 장면이었다.

김현수의 성장에는 여러 가지 ‘운’이 동시에 작용한 것 같지만 그 뒤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피나는 노력이 감춰져 있었다. 김현수는 2006시즌 2군에서 스윙 스피드를 늘리기 위해 매일 1000개씩의 스윙을 했다. 김광림 타격코치는 김현수의 스윙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서 특별한 훈련을 했다. 토스 배팅 때 원래의 타격 포인트를 향해 공을 던져주는 대신 김현수의 배를 향해 빠르게 던지는 훈련을 이어갔다. 그 공을 때리지 못하면 배에 맞게 되는 훈련. 이를 통해 김현수는 더욱 빠른 스윙 스피드를 가진 타자로 성장했다.

김현수는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년 WBC 등을 거치면서 두산은 물론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쑥쑥 자랐다. 그리고 김현수는 자신의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그런데, 김현수는 어떻게 메이저리그 구단의 마음을 살 수 있었을까. 그저 잘 치기만 하는 타자만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실제 김현수는 박병호와 비교했을 때 장타력에서 뒤진다. 김현수의 주 포지션인 좌익수는 장타력이 요구되는 자리다. 그럼에도 메이저리그 구단은 김현수의 능력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볼티모어 외에도 샌디에이고, 피츠버그 등이 김현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메이저리그가 김현수에게 주목한 이유는 강정호·박병호로 대표되는 ‘호호 효과’보다 올 시즌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캔자스시티 효과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캔자스시티는 최근 메이저리그의 흐름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성공했다. 장타력 대신 정확하게 맞히는 능력에 주목했고 스피드를 더했다. 홈런을 때리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는 점을 완벽히 증명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캔자스시티는 올 시즌 팀 홈런이 139개에 그쳤다. 30개 구단 중 24위였다. 아메리칸리그 팀 중에서는 13위였다. 대신 팀 타율은 0.269로 메이저리그 전체 3위였다. 캔자스시티의 목표는 ‘어떻게든 때려서 인플레이 상황을 만든다’로 설명될 수 있다. 일단 타구를 때리게 되면 주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 목표 속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삼진이다. 타자가 삼진을 당하면 주자들은 움직일 수 없다. 가장 비효율적인 아웃이 바로 삼진이다. 캔자스시티 타자들은 올 시즌 삼진을 973개밖에 당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가장 적은 숫자다. 2위 애틀랜타와도 30개가량 차이가 난다.

캔자스시티 효과는 김현수의 가치를 높였다. 김현수는 KBO리그 최고의 교타자였다. 공을 맞히는 능력이 발군이다. 삼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으로 꼽혔다. 김현수의 통산 삼진율(삼진/타석)은 10.5%밖에 되지 않는다. 캔자스시티가 몰고 온 새로운 흐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타자였다.

<이용균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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