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븐이 식는다’ 위기의 프랑스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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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빵 문화가 생존의 기로에 놓였다. 올겨울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파르게 치솟은 에너지와 재료 가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빵집들의 폐업과 파산이 속출하고 있어서다. 빵집의 위기와 제빵사들의 분노가 프랑스 정치권의 가장 폭발력 있는 뇌관으로 떠올랐다.

프랑스 니스의 빵집 아르망드에 지난해 11월 28일 진열된 바게트 /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니스의 빵집 아르망드에 지난해 11월 28일 진열된 바게트 /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북부 도시 릴 인근에서 27년 동안 빵집 ‘라 부르겔루아즈’를 운영 중인 베로니크 카필리에즈는 올해부터 주말에만 빵집 문을 열기로 했다. 견습생과 영업사원도 해고했다. “마을 유일의 빵집이 문을 닫는 것은 마을의 죽음이나 다름없다”며 아쉬워하는 고객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필리에즈는 “지난해 1월 1900유로(약 256만원)이던 전기요금이 이번 달 6700유로(약 900만원)가 될 것”이라며 “정부 도움 없이는 주말조차 문을 닫게 될지 모른다”고 공영 라디오 채널 프랑스3에서 밝혔다.

프랑스 전역 빵집 없는 마을 늘어

충격적인 청구서를 받아든 이는 카필리에즈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북부 도시 크레이의 제빵사 쥘리앵 페뒤셀은 지역 매체 쿠리에 피카르에서 최근 석 달간 자신에게 청구된 전기요금을 공개했다. 지난해 10월 1000유로, 11월 6000유로, 12월 1만2880유로였다. 지중해 도시 니스의 유명 제빵장인이자 프랑스 요리 유산 보호 캠페인을 벌이는 프리데리크 루이는 지난해 11월 780유로이던 월 전기료가 다음 달 1만7514유로로 뛰어올랐다고 트위터에 청구서를 공개했다. 월 전기 사용량은 5000kWh로 비슷했지만, 요금은 10배 이상 뛰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있어 통상 대목이게 마련인 12월이 이번엔 수많은 제빵사에게 악몽이 됐다.

프랑스에서 전기요금은 가스 가격에 연동된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전기요금 인상률에 상한을 뒀지만, 사업용 전기에는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이에 프랑스의 모든 사업자가 가파른 전기요금 상승에 고통을 겪고 있다. 오븐 때문에 가스 사용량이 많은 빵집은 특히나 에너지 위기의 취약 업종으로 꼽힌다.

에너지 외 다른 원료 가격도 크게 올라 제빵업계를 압박하고 있다. 밀가루, 달걀, 버터, 포장재 등 재료 전반의 가격이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폭등했다. 밀가루 가격만 해도 지난해 15% 올랐다. 달걀의 경우 조류독감까지 퍼지면서 가격상승을 부채질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대형 슈퍼마켓 체인들이 연달아 저가 빵을 내놓고 있어 독립 제빵업자들이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반면 빵 가격 인상에는 한계가 있다. 국제여론조사기관인 IFOP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31%만이 바게트에 1.5유로를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바게트는 현재 1.2~1.3유로에 팔리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바게트는 국민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사 먹을 수 있는 ‘평등의 상징’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빵집 주인들은 폐업 외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빵집 없는 마을도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3에 따르면 프랑스 남서부 라 로슈보쿠흐 마을의 유일한 빵집도 최근 문을 닫았다. 주민들은 빵을 사려면 차를 몰고 10분 동안 운전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 빵집은 신문보급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수잔느(95)는 “나는 운전할 수도 없다”며 “아침에 빵집에 가서 초콜릿 빵을 사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 하루가 더 빨리 간다. 빵집의 죽음은 라 로슈보쿠흐의 죽음”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니스의 빵집 아르망드 주인이 지난해 11월 28일 바게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니스의 빵집 아르망드 주인이 지난해 11월 28일 바게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치솟은 에너지·재료 가격 감당 못 해

프랑스 전역에는 약 3만3000개의 빵집이 있다. 11만명이 빵집에서 일한다. 대형 슈퍼 체인의 발달과 식생활의 변화로 프랑스에서도 장인이 운영하는 독립 빵집을 찾는 발길이 많이 줄었지만 수백만명이 여전히 충실한 고객이다. 특히 지방 중소도시와 시골에서는 장인들이 전통 레시피를 갖고 운영하는 등 빵집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지난 총선 때 브장송에서 좌파연합 후보로 출마했던 제빵사 스테판 라클레이는 “지역 사람들은 프랑스가 흔들리고 있고 빵집을 마을의 마지막 사회적 유대 고리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제빵장인들을 죽게 내버려 두면 농촌은 폭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프리카 기니 출신 견습생이 추방 위기에 놓이자 그를 지원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하면서 유명해졌다.

정치권도 긴장하고 있다. 1월 10일 발표 예정인 연금개혁안과 맞물리면서 에마뉘엘 마크롱 정권을 뒤흔들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빵집의 위기는 당장 국민의 식생활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인의 문화적 자부심을 뒤흔드는 이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바게트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자 “마법과도 같은 250g”이라고 찬사를 남겼지만,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은 제빵업계를 위해 한 일이 없다는 비난에 처했다. 극우 정당 국민전선은 “귀하의 제품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라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빵집 주인들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제빵업계의 불만이 커지자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1월 3일 전력공사(EDF), 토탈에너지 등 에너지 공급 업체 관계자들을 불러 대책 회의를 했다고 AFP통신 등이 전했다. 르메르 장관은 ‘바게트의 장인 노하우와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로 등재된 지 한 달 만에 제빵업계를 절망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르몽드 등에 따르면 정부 대책은 자금난에 빠진 제빵사들의 세금 납부를 면제하고 에너지 가격이 지나치게 상승할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 정도가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연료 보조금 등으로 전기요금의 40%가량을 절약할 수 있다고 본다. 일부 의원들은 사업자들에게도 전기요금 상한을 적용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업종과의 형평성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제빵업계에서는 현재 정부가 거론하는 대책이 생존 위기를 잠재우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며 볼멘소리를 내놓고 있다. 제빵사들은 오는 1월 23일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 예정이다. 프랑스 북동부 모젤에서 최근 폐업한 제빵사 쥘리앵 베르나르 레냐르는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빵의 위기는 프랑스의 위기를 상징한다”며 “우리 제빵사들이 거리로 나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직업을 훨씬 뛰어넘는 진짜 문제가 온 나라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 박은하 국제부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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