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의외로 숫자에 집착한다. 특히 사람의 관심을 끄는 숫자는 ‘10’으로 나눠떨어지는 수다. 아기의 ‘백일잔치’가 그렇고, 연인과 축하하는 ‘100일’, ‘500일’. ‘1000일’ 따위의 기념일이 그렇다.
정치권에도 ‘100일’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는데, 지도자의 첫 100일 업적을 따져보는 관습이 그렇다. ‘대통령의 100일’은 ‘연인의 100일’에 가까운데, 이 시기가 새 대통령의 ‘허니문’ 기간과 겹쳐서만은 아니다.
현대의 분권화된 정치제도에서 100일은 실질적 성과를 파악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다. 물론 신임 대통령은 국민의 높은 기대와 신선한 이미지를 활용해 개혁과제를 빠르게 진척시킬 수 있고, 이때만큼은 야당도 순순히 협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때 보인 역량이 임기 내내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고, 약속했던 개혁을 중간에 걷어차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취임 100일’은 정책의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고 호응을 얻는 기간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세계 정치사에 ‘100일’의 의미를 극적으로 새긴 지도자로 ‘100일 천하’의 나폴레옹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들 수 있다. 루스벨트는 경제대공황의 파국이 깊던 1933년에 당선돼 100일 만에 구제, 임금, 주거, 일자리, 물가, 금융, 산업과 관련한 법을 76개나 통과시키며 뉴딜의 토대를 다졌다. 그 이후 ‘대통령의 100일’은 신임 지도자의 초반 업적을 가늠하는 높디높은 기준이 됐다.
루스벨트와 비교될 운명의 바이든
이후 어떤 미국 대통령도 루스벨트와 견줄 만한 100일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꼭 후임들이 무능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루스벨트의 놀라운 성과는 경제공황이라는 특수 상황이 절체절명의 위기감과 결합해 탄생한 결과였다. 이 점은 루스벨트가 측근과 나눈 대화에도 드러난다.
“대통령께서 임기를 마칠 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 아니면 최악의 지도자, 둘 중 하나로 기록될 것입니다.”
“실패하면 최악의 대통령이 아니라 마지막 대통령이 되겠지요.”
다행히 그는 워싱턴·링컨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이 됐지만, 후임들에게는 ‘취임 100일’이라는 기대가 큰 부담으로 남았다. 케네디는 1961년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을 취임 100일까지 해낼 수 없을 것이고, 1000일 이내에도 불가능할 것이며, 현 정부 임기는 물론 생이 다할 때까지 완수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함께 시작합시다.” 트럼프는 100일이 코앞에 다가오자 “내가 100일이라는 터무니없는 기준에 맞춰 수많은 업적을 낸다 해도 언론은 씹어대기만 하겠지!”라는 트윗을 날렸다.
바이든 대통령이 4월 29일로 취임 100일을 맞았다. 애초부터 그는 루스벨트와 비교될 팔자였는데, 코로나19 대유행이 남긴 경제적·사회적 상처가 대공황에 비견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임자가 남긴 정치적 혼란도 한몫했다. ‘바이든의 100일’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 단기간의 성적은 훌륭하다. 무엇보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효과적으로 통제했고, 1조9000억달러(약 2140조원)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마련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의 개혁성과는 구체적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새 정부는 경기부양의 혜택을 빈곤층, 아동, 여성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에 필요한 재원을 부유층 증세를 통해 마련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다수가 타격을 입었지만, 그중 자녀를 양육하는 여성은 이중으로 고통받고 있다. 바이든의 100일 동안 일자리가 1500만개 이상 늘고 실업률은 6%대로 떨어졌지만, 여성들의 일터 복귀는 매우 더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집에 머무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학교와 유치원을 빠르게 열도록 조처하는 동시에 무상교육 확대 방안을 내놓았다. ‘미국가족계획’을 통해 자녀가 있는 가정에 대한 세액공제와 재정지원을 늘리고, 현재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13년 무상교육에 4년을 추가할 계획이다. 유치원 등원 이전의 3~4세 아동들에게 2년간의 프리스쿨을 국가가 보장하고, 2년제 직업 전문대(커뮤니티칼리지) 교육도 무상화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저소득층 자녀 1명당 6세 이하는 300달러, 6세 이상은 250달러를 매달 지급하기로 했다. 또한 소득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계약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10.95달러(팁 받는 노동자는 7.65달러)에서 15달러로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동계는 “전국 노동자들의 승리”라며 반기고 있다.
‘100일’ 기준의 한계를 넘어
바이든의 최고 업적은 코로나19로부터 시민의 목숨과 건강을 지켜낸 것이다. 취임 당시 20만명에 가까웠던 하루 확진자 수는 100일을 전후해 5만명대로, 사망자는 4000명대에서 900명대로 줄었다. 백신도 2억회 넘게 접종해 미국을 접종 모범국으로 만들었다. 취임 당시 “100일 이내에 백신 1억회를 접종하겠다”던 약속을 두 배로 지킨 셈이다.
바이든의 개혁적 성과는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트럼프에게 ‘졸린 조’로 놀림 받던 그는 민주당 지지자들에게조차 ‘진보 개혁가’로서 뚜렷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큰 기대와 희망 속에서 집권했지만, 미흡한 개혁으로 트럼프에게 백악관을 넘긴 오바마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이유가 컸다.
앞으로 바이든이 풀어가야 할 숙제가 만만찮다. 취임 이후 50%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지율은 트럼프 이후 미국사회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양극화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외적으로는 파리기후협약과 세계보건기구(WHO)에 복귀하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미얀마 군부 학살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무력충돌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등 뚜렷한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 역시 ‘100일’은 성급한 기준으로 보인다. 객관적 평가를 위해서는 ‘취임 100일 후’보다 ‘퇴임 100일 전’이 바람직한 지표가 될 듯하다.
<강인규 펜실베이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 언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