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신뢰 먹칠했지만 트럼프에게는 무소불위의 칼 쥐여줘
“법 집행에 정치적 개입을 용인하는 것보다 우리 정부 시스템과 법치, 또는 국가기관으로서 법무부에 해가 되는 것은 없다.” 법치 수호가 임무인 법무부를 존중하는 이 말을 한 주인공은 윌리엄 바 법무장관(70)이다. 바 장관은 1991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각각 법무장관에 지명된 뒤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법무부의 정치적 독립을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공염불이 됐다. 그는 현재 사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시작은 2월 5일(현지시간) 트럼프 탄핵심판에 대한 상원의 무죄선고였다. 이를 면죄부로 여긴 트럼프는 반대자를 향해 보복의 칼을 마음껏 휘둘렀다. 특히 자신의 옛 참모로 ‘러시아 게이트’와 관련해 기소된 로저 스톤(68)에 대한 법무부의 구형에 개입함으로써 권력남용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으로서 연방 형사사건에 개입할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대통령은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반헌법적 논란을 빚었다.
법 위에 군림하려는 트럼프보다 바 장관이 더 문제다. 그는 1970년대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 ‘워터게이트 사건’ 이래 법무부가 백악관이나 당파적 이해와는 거리를 유지해온 전통을 깨고 정치 개입의 빌미를 주고 독립성과 신뢰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아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그가 트럼프의 위법행위에 눈을 감음으로써 향후 트럼프가 민주당 후보들의 약점을 조사하는 빌미를 줄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오는 11월 미 대선을 향한 레이스 초반 민주당 대선후보 버니 샌더스나 피트 부티지지보다 더 뜨거운 인물이 된 바 장관. ‘제왕적 대통령제’를 옹호하는 그의 행보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탄핵심판 무죄선고로 날개 단 트럼프
탄핵심판 무죄선고는 안 그래도 제멋대로였던 트럼프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트럼프의 ‘뒤끝 행보’는 거침없었다. 트럼프는 다음날인 2월 6일 초당파적 연례 조찬기도회에서 “나는 자신의 행위가 잘못됐음을 알면서도 신념에 따르는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싫다”고 말했다. 전날 상원 탄핵심판에서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의 밋 롬니와 자신을 탄핵 심판대에 올린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각각 겨냥한 발언이었다. 2월 7일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우크라이나 담당자 알렉산더 빈드먼 중령과 유럽연합(EU) 대사 고든 선덜랜드를 해임했다. 지난해 가을 하원의 탄핵조사에서 증언했다는 게 이유였다. 빈드먼의 쌍둥이 형제 예브게니 NSC 변호사도 같은 날 해임됐다.
트럼프의 행정부 내 반대자에 대한 숙청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트럼프는 ‘러시아 게이트’ 수사 중단 요구를 거절한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2017년 5월 해임했다. 2018년 3월에는 코미 후임으로 FBI 국장대행을 맡아온 앤디 매케이브마저 공식 퇴임 이틀 전에 내쫓았다. 로버트 뮬러 특검 보고서에 대한 감사를 거부한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과 로드 로젠스타인 부장관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러시아 게이트로 기소된 트럼프의 옛 참모인 로저 스톤의 구형량에 개입한 사건은 또 다른 권력남용·사법방해 논란을 일으켰다. 스톤은 2016년 미 대선 당시 비선 참모로 트럼프 대선캠프가 러시아와 공모·결탁했다는 의혹인 ‘러시아 게이트’ 조사 과정에서 목격자 매수 등 7개 혐의로 기소됐다. 법무부는 2월 11일 저녁 스톤에 대해 징역 7~9년을 구형했다. 트럼프는 다음날 새벽 2시에 “매우 끔찍하고 불공정하다”면서 “오심을 용인할 수 없다”는 트윗을 날렸다. 법무부가 이날 구형량을 낮추기 위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밝히자 스톤 사건담당 검사 4명이 반발해 사임계를 제출했다. 트럼프는 이날 밤 올린 트윗에서 스톤을 사면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스톤의 변호사들은 담당 에이미 버먼 잭슨 판사에게 보호관찰을 요구해온 터였다. 트럼프는 잭슨 판사를 직접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2월 12일 밤 그를 겨냥해 “(러시아 게이트 특검에 기소된) 폴 매너포트(전 선대본부장)를 독방 수감해 악명 높은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게 한 판사가 이 사람인가”라는 트윗을 올렸다.
스톤에 대한 트럼프의 구형량 개입은 큰 반발을 샀다.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훌륭한 법무부의 위대한 전통과 법규가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욕망과 필요에 따라 완전히 왜곡됐다. 오명을 남겼다”고 말했다. <뉴리퍼블릭>의 매튜 포드 기자는 2월 14일 “로저 스톤 사건은 향후 어느 당원대회나 예비선거보다 대선 때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면서 “백악관은 상원의 트럼프 탄핵 무죄선고를 11월 선거 때까지 뭐든 할 수 있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트럼프의 법무부 장악의 실질적인 위험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일”이라면서 “트럼프가 닉슨 이후 어떤 대통령보다 더 연방 형사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개인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려 하고, 법무부를 자신의 재선 캠페인 속에 포함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닉슨 행정부 시절 워터게이트 사건 때 법무부 검사가 항의 표시로 사임하고 다른 검사는 사건에 연루돼 유죄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법무부는 이후 백악관이나 당파적 이해와는 거리를 유지해온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법무부는 정치 개입과 신뢰 훼손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2월 14일 트럼프가 눈엣가시로 여겨온 앤드루 매케이브 전 FBI 국장 대행에 대한 수사를 종결한다고 밝혔다. 매케이브 전 국장 대행은 FBI 재직 시절 ‘러시아 게이트’와 관련한 트럼프의 사법방해 의혹 수사를 승인하자 트럼프는 그의 공식 퇴임을 이틀 앞두고 해고했다. 하지만 같은 날 FBI가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수사를 제대로 한 건지 재조사하라고 바 장관이 지시했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 지난 12일 바 장관이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인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 관해 모은 우크라이나 자료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밝힌 것을 보면 법무부의 공정성 논란은 당분간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분출하는 바 사퇴 요구와 트럼프의 감싸기
법무부의 공정성 논란 중심에는 바 장관이 있다. 그는 ‘제왕적 대통령’을 옹호하며 2019년 2월 14일 취임 이후 트럼프의 호위무사이자 충복을 자처했다. 그의 사임 요구를 부른 것은 트럼프의 로저 스톤 구형량 개입 트윗과 이후 법무부의 대응이다. 사퇴 요구는 민주당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전직 법무부 검사 및 관료 2000여 명은 2월 16일 인터넷에 공개된 공개서한에서 바 장관이 트럼프의 측근 로저 스톤에 대한 검사들의 구형량을 낮춤으로써 사법권을 정치적으로 남용하고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공개서한 서명자이자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법무부 부장관을 지낸 도널드 에이어는 2월 17일 <애틀랜틱> 기고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아무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우리 정부 체제의 기본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바의 말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 체계 아래서 우리 정부 안에서 권한이 제약받지 않는 사실상 독재적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그의 오랜 신념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앞서 하원 법사위원장인 제럴드 내들러(민주당)는 2월 12일 바 장관에게 오는 3월 31일 법사위 청문회에 출두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트럼프의 개인변호사인 루디 줄리아니로부터 ‘우크라이나 스캔들’ 관련 정보를 넘겨받은 사실 등을 포함해 법무장관으로서 이해충돌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바 장관은 참석 의향을 밝혔다.
조이스 화이트 밴스 앨라배마대 법대 석좌교수는 2월 16일 <타임> 기고에서 “바 장관이 트럼프의 이 말을 반박하지 않을 경우 트럼프의 트윗은 법무부에 영구적인 오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밴스 교수는 “트럼프가 그의 트윗을 바로잡지 않고, 법무부는 그가 개입하고자 할 때마다 그의 통제에 따라 기소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면, 법무장관의 유일한 대응은 사임”이라면서 “법치와 법무부 직원을 존중하는 장관이라면 대통령이 그것을 남용하려 할 때 가만히 앉아 있거나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바 장관은 가만히 있었다.
트럼프와 백악관, 공화당은 바 장관을 적극 옹호했다. 트럼프는 2월 14일 아침 바 장관의 전날 ABC방송 인터뷰에 대해 ‘대통령은 결코 나에게 형사사건에 있어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바 장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내가 대통령으로서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하지 않겠다는 것을 선택했다”는 트윗을 날렸다. 전날 그를 공개비판한 바 장관에 대한 지지를 드러낸 것이다. 바 장관은 ABC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일부 트윗으로 인해 문제가 있다”면서 “법무부의 사건들에 대해 트윗은 이젠 그만둬야 할 때”라고 말했다. 스테파니 그리샴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대통령은 (바 장관의) 언급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바 장관)는 모든 미국인처럼 의견을 표시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직접 나서서 바 장관을 감쌌다. 그는 2월 18일 캘리포니아로 가기 전 앤드루기지에서 기자들에게 바 장관에 대해 “나는 그의 일을 더 힘들게 할 거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법무장관이 있으며, 그는 매우 열심히 일한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바 장관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자 미치 매코넬 상원 원내대표와 린지 그레이엄 법사위원장 등 공화당 지도부도 바 장관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트럼프 칼날, 민주당 대선 후보로 향할까
트럼프가 탄핵 무죄선고 이후 한 일을 보면 법무부의 제동이 없을 경우 트럼프의 칼날이 쉽게 멈추지 않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칼날은 결국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들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과 연루된 각종 의혹에 대한 수사, 재수사 가능성이 그것이다. <뉴리퍼블릭> 2월 14일 “트럼프는 개인적으로 그의 정치적 반대자를 기소해 감옥에 보내고 싶어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연루된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 조사, 버니 샌더스의 부인 제인 샌더스의 2010년 벌링턴대 토지 거래에서의 역할 재조사, 피트 부티지지의 경우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 재직 시절 경찰 관행 조사, 마이클 블룸버그의 경우 시티타임 사기 스캔들에서의 역할 조사 가능성을 언급했다. 모두 대선 정국에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사안들이다.
탄핵 무죄선고 이후 트럼프가 행정부 내 반대자에게 보복한 방식은 과거 정부가 했던 ‘부드러운 숙청(soft purge)’이다. 부드러운 숙청은 옛 소련이나 나치 시절의 피의 숙청에 반대해 개인의 생계나 경력, 평판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0~1950년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공화당)이 자행한 ‘매카시즘 광풍’이다. 물론 매카시 이전에도 있었다. 에드거 후버 FBI 국장 시절이다. 후버는 당시 알렉산더 미첼 팔머 법무장관과 함께 반공 공포감을 부추겨 ‘외국인 및 보안법’에 의거해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수천 명을 체포해 밥벌이 수단을 빼앗았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의 경우 소비에트 러시아로의 추방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찰의 노조 사무실 급습이나 정치 집회장에서의 방망이 세례는 일상사였다.
트럼프의 전략은 당시 선동가나 공포 조장자가 한 것과 비슷하다. 프리랜스 언론인 사샤 아브람스키는 2월 16일 <트루스아웃> 기고 ‘트럼프의 탄핵심판 무죄 선고가 매카시즘의 새 시대를 열었다’에서 “매카시즘 선풍으로 수천 명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단지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이유로 연루돼 일자리를 잃었다”면서 “매카시 상원의원의 오른팔이었던 로이 콘 변호사는 젊은 시절 트럼프의 멘토였다”고 지적했다.
<조찬제 선임기자 helpcho6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