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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양규)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새삼 부각되는 역사적인 인물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고려판 세종대왕’으로 통하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죠.
1254년 몽골의 잇따른 침략에 시달리던 고종(재위 1213~1259)은 ‘국난 극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면서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하죠. “세종대왕(世宗大王·현종)께서 큰 난리를 평정해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웠다”고 표현한 겁니다.
■고려판 이순신
또 한 분은 2차 고려-거란 전쟁 승리의 주역인 양규(?~1011) 장군입니다.
돌이켜보면 3차례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낸 세 분이 있죠. ‘1차(993~994)=서희(942~998)’, ‘2차(1010~1011)=양규’, ‘3차(1018~1019)=강감찬(948~1031)’입니다.
이중 서희와 강감찬 등에 비해 2차 전쟁의 주역인 양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됐습니다. <고려사>에 양규 장군의 행적은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한 1010년 11월 16일부터, 전사한 1011년 1월 28일까지 딱 2개월 10여일치만 남아 있습니다.
현종은 양규 장군에게 ‘공부상서’ 관직을 추증했고요. 부인에게는 해마다 벼 100곡을 제공하고, 아들(양대춘)에게도 관직(교서랑)을 주었습니다. 현종은 그때 양규의 공을 거론합니다.(<고려사> ‘열전·양규’)
“그대의 남편이…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해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로써 고려의 강토가 보존될 수 있었다….”
양규는 1024년(현종 15)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까지 하사받았습니다. 삼한후벽상공신은 ‘태조 왕건 때의 삼한공신 이후 공신각의 벽에 초상이 봉안된 공신’을 뜻합니다. 이런 분인데, 지금까지 홀대를 받았던 겁니다.
이번 드라마 덕분에 ‘양규=고려판 이순신’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요. 고려 땅을 넘본 거란군을 끝까지 섬멸하고 전사한 양규 장군이죠. 이순신(1545~1598) 장군도 퇴각하는 왜군들과 최후 일전(노량해전)에 앞서 “이 원수만 무찌르면 죽어도 한이 없다(此讎若除 死則無憾)”고 외치며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몸과 뼈가 가루가 될지언정…
이제 역사서에 기록한 그대로만 ‘2차 고려-거란 전쟁’과 양규 장군 이야기를 해볼까요.
1009년 1월 고려에서 큰 정변이 일어나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1010)가 목종(재위 997~1009)을 폐하고 현종을 세운 겁니다. 강조의 정변입니다. 그러자 거란의 성종(재위 982~1031)은 “임금을 시해한 강조의 대역죄를 묻기 위해 직접 출정하겠다”(<고려사> ‘세가·현종’)고 선언합니다. 고려도 가만있을 수 없었죠.
강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통주에 진을 쳤습니다(<고려사> ‘세가 현종’). 11월 16일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거란 성종은 흥화진(평북 피현군 당후리)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등장합니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거란 황제가 흥화진을 포위하자 양규는 도순검사(조정이 파견한 임시 군지휘관)가 되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흥화진성은 22일까지 7일 동안 펼쳐진 거란군의 거센 공세에도 끄떡없이 버텼습니다. 그 와중에 거란 성종이 항복을 권유하는 칙서를 잇달아 보냅니다. “역신 강조를 사로잡아 네 앞에 내보내면 철군할 것”이라고 한 겁니다.
양규 등은 그러나 흥화진 부사 이수화의 명의로 “(황제가) 군사를 돌려 자중해야 고려의 복종을 얻을 것”이라는 답서를 보냅니다. 거란 성종이 재차 “답서를 보니 귀순할 뜻이 없고, 내용도 불성실하며 문장도 겉만 번드르르하다”고 꾸짖었는데요.
이에 고려군은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고려의 종묘사직을 받들 것”이라면서 결사항전을 외쳤습니다.
“거란 황제는 ‘고려군이 결코 항복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읽고 흥화진의 포위를 풀었다. 거란 황제는 20만 대군을 인주(의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켰다. 나머지 20만 대군은 통주로 진출했다.”(<고려사> ‘열전·양규’)
이 흥화진의 항전은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거란군의 7일 공세에도 끄떡없이 성을 지켜냄으로써 거란의 40만 대군 중 절반인 20만명의 발목을 묶어둔 겁니다. 양규 장군은 지켜낸 흥화진을 기반으로 거란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반격작전을 펼침으로써 치명타를 안겼습니다.
■“난 강조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거란군의 다음 목표는 강조가 지키고 있던 통주성이었습니다. 전투는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벌어졌습니다. 강조는 성을 부하들에게 맡겨두고 통주성 남쪽(삼수채)까지 나와 거란군과 싸웠는데요. 처음엔 연전연승했습니다.
하지만 거란군의 총공세에 강조가 사로잡히고 고려군 3만명이 전사했답니다. 강조는 “내 신하가 되라”는 거란 성종의 권유에 “고려 사람이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버텼고요. 결국 처형당했죠.
그렇게 강조 군대를 깨뜨린 거란군은 통주성으로 달려가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고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막아냈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통주성도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거란은 흥화진에 거짓으로 꾸민 강조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긴 겁니다.
거란군은 흥화진-통주성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곽주성 공략에 나섭니다(12월 6일). 곽주성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함락됐습니다. 거란군은 6000명을 성에 잔류시켰습니다.
그러다 10일 뒤인 12월 6일,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양규 장군이 필살의 반격작전에 나섭니다.
흥화진 군사 700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흩어진 군사 1000명을 수습했고요. 밤중에 거란군이 점령한 곽주성을 공격한 겁니다. 불의의 기습작전에 거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요. 양규 장군은 성안의 백성 7000여명을 구출해 통주성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흥화진과 통주성을 사수하고, 빼앗겼던 곽주성마저 탈환하자 거란군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조해진 거란 황제
전쟁이 길어질수록 거란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요사>(병위지)는 “(원래 유목민인 거란은) 출병은 9월을 넘기지 않고, 철군은 12월을 넘기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농사를 짓는 정주민(고려 등)의 경우 9월부터 추수를 끝내고 곡식을 저장하잖아요. 거란군은 전쟁 기간 중 군량을 현지 조달했거든요.
고려군은 그러나 백성과 곡식을 모두 성안에 들여놓고 결사항전하는 ‘청야술’로 맞섰거든요. 그러니 거란군은 고려 땅에서 조달할 군량미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12월이 지나면 말들을 다시 초원에 방목해야 할 시기가 되죠.
그런데 전쟁이 질질 늘어지면 어찌 되겠습니까. 거란군으로서는 철군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황제가 친정한 전쟁이니만큼 고려 현종의 무릎을 꿇려야 체면이 서는 건데요. 그렇지만 고려가 그렇게 녹록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죠.
■고려의 거짓 입조 약속
고려 현종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흥화진-통주를 지켰고, 곽주도 재탈환하기는 했죠. 거란군의 남진은 계속됐고요. 서경이 풍전등화의 지경에 빠졌습니다.
이 무렵 ‘현종이 거란의 성종을 알현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합니다(<고려사절요>). 하지만 고려 현종이 쉽게 거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죠.
서경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16일간(12월 11~26일) 벌어졌고요. 결국 거란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돌진합니다. 급기야 12월 28일 현종이 개경을 떠나 피란길에 오릅니다. 피란을 권한 이는 예부시랑(정4품) 강감찬이었습니다.
“(전쟁의 책임이 있는) 강조가 이미 죽은 만큼 우려할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의 형세가 워낙 강성하므로 일단 그 예봉을 피해야 합니다….”(<고려사절요> 12월 28일)
이것이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나오는 유일한 ‘강감찬’ 기사입니다.
■‘입조했다’치고 철수
이때 고려는 하공진(?~1012)과 고영기(미상)를 거란 진영에 보내 강화를 요청합니다.(12월 30일)
“국왕(현종)이 진실로 와 뵙기를 원했지만 거란 군대의 위세가 너무 강성한 데다… 멀리 강남 지역으로 피란 가셨습니다….”
거란 측이 “고려 국왕이 어디 있냐”고 묻자 하공진은 “왕(현종)이 간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만 리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거란 성종은 철수를 허락하면서 하공진 등을 인질로 잡아갔습니다.(<고려사절요> 1011년 1월 3일)
<요사>는 “고려가 ‘요군이 철군하면 고려 국왕이 입조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전했습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그러나 현종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입조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거란군이 철군합니다. 정식으로 강화가 성립됐는지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아요.
하공진 등이 찾아오자 철군의 명분을 찾느라 골몰하던 거란 성종이 ‘옳다구나’ 싶어 덥석 강화를 받아들인 인상이 짙어요. ‘입조했다’고 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철군해버린 것 같아요.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그렇게 쫓기듯 철군하는 적군을 그냥 보내줬을까요.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정리해보죠.
1월 17일 귀주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 군사를 쳐서 1만여 수급을 베었고요.
18일부터 주인공인 양규 장군이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18일 양규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에서 습격했다. 거란군 수급 2000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000여명을 구했다.”
“19일 양규가 이수에서 석령까지 추격하며 수급 2500여 급을 베고 백성 1000여명을 빼앗았다.”
“22일 양규가 여리참에서 수급 1000여 급을 베고 남녀 1000여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28일 양규가 애전(의주)에서 거란의 선봉을 공격해서 1000여 급을 베었다. 얼마 후 거란 군주가 이끄는 대군을 맞아 양규와 김숙흥이 하루종일 싸우다가…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고려사절요>는 양규의 활약상을 제대로 정리합니다.
“양규는 후원군도 없는 의로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한 달 만에 7번 싸워 거란 군사들을 다수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만여명을 구해냈다”면서 “낙타와 말, 무기 등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고 전했습니다.
양규·김숙흥 장군이 전사한 뒤에도 고려군은 거란군이 그냥 압록강을 건너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29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반쯤 건너려 할 때 흥화진사 정성(미상)이 공격했다.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양규 장군은 한 달 사이 7전 7승의 신화를 이뤄냈고요. 그 휘하인 김숙흥과 정성 등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 거란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이역만리 거란 땅에까지 끌려갈 운명이었던 포로 3만명을 구해낸 것은 천고에 빛날 양규 장군의 공적입니다.
■갈 때는 곱게 못 보내준다
또 “올 때는 그냥 왔지만 갈 때는 곱게 못 보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거란군도 그 꼴이 됐습니다. 오죽하면 송나라 사서인 <송사>의 ‘고려전’이 “고려 현종이 기이한 대책을 세워 침략한 거란군을 다 죽였다”고 평가했겠습니까. 황제의 체면에 엄청난 ‘스크래치’가 난 거란 성종은 어찌 됐을까요.
1012년 4월과 7월 19일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약속대로 친조하라”(<고려사>)고 재촉하는데요.
현종은 그러나 요즘 말로 “뭐래?”를 외쳤습니다. 고려는 “왕(현종)이 아프다”(<고려사>)고 점잖게 거절하는데요. 그러자 거란 성종은 “그럼 고려가 차지한 강동 6성까지 빼앗아라”고 불같이 화를 내죠. 고려가 그러나 왜 강동 6성을 내주겠습니까.
이번에 2차 고려-거란 전쟁을 다루면서 새삼 느낀 것이 있습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대부분이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는 ‘뭇 영웅’으로, 겨우 이름 석 자만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름 석 자라도 남은 분들은 그나마 다행이죠. 이름도 빛도 없이 싸우다 스러진 장수와 병사들 그리고 백성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