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클리어 나우-올리버 스톤 감독이 눈감고 외면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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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원자력을 청정(clean)에너지라고 부른다. 가만. 청정에너지가 맞나. 감독이 ‘청정에너지’로 부르는 이유는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탄소 배출을 하지 않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맞나?

/로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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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뉴클리어 나우(NUCLEAR NOW)

제작연도: 2023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05분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

출연: 올리버 스톤 외

각본: 올리버 스톤, 조슈아 골드스타인

음악: 반젤리스

개봉: 12월 6일

등급: 전체 관람가

“여기서 수영해도 되나요?” 사용후핵연료 저장 수조 시설을 방문한 올리버 스톤 감독이 물었다. 시설 방문을 안내한 발전소 관계자는 양팔을 벌리며 쓱 미소를 지었다. 해도 된다는 걸까, 안 된다는 걸까. 영화에선 답이 없다.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을 방문하기 전 감독 일행은 절대로 고개를 내밀어 수조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주의를 받는다. 심지어 카메라도 난간 너머로 내밀면 안 된다고 했다. 랜들 먼로가 쓴 <위험한 과학책>(2015)에 감독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그 답은?

수영해도 된다. 물은 생각보다 방사선 차폐 성능이 좋아 사용후핵연료에서 나오는 방사선은 약 7㎝ 두께의 물을 통과할 때마다 방사선량이 반감된다. 책에서 저자는 ‘안전거리만 유지한다면’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자연방사능보다 적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건 ‘이론상’이다. ‘지구 생활상 엉뚱한 질문에 대한 과학적 답변’이라는 부제가 달린 저 책의 저자는 이 대목을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은 조크를 덧붙여놨다. 저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자 관련 시설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해 물었다고 한다. “‘우리 원자로에서?’ 친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금방 죽을 것 같은데? 아마 물에 닿기도 전에 죽을 거야. 총에 맞아서.’”

사용후핵연료 저장 수조에서 수영 가능할까

당면한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어 보인다. ‘여섯 번째 대멸종’ 저지 임계점을 이미 넘어섰다는 우울한 전망도 있다. 그런데 감독은 해법이 있다고 한다. 어떤? 답은 원자력이다. 2050년 탄소 배출 제로를 목표로 지금부터 전 세계에서 비행기 공장을 짓듯이, 원자로 짓는 공장을 풀 가동해 기존의 석탄·석유로 대표되는 화석연료를 전기로 대체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원자력을 청정(clean)에너지라고 부른다. 가만. 청정에너지가 맞나. 감독이 ‘청정에너지’로 부르는 이유는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탄소 배출을 하지 않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해할 것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퀴리 부인의 경구로부터 시작한 영화는 1896년 퀴리 부부의 우라늄 발견에서부터 핵분열의 이론적 입증(1938), 시카고대학 지하의 스쿼트장 핵분열 실험(1943), 그리고 맨해튼프로젝트에 의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1945)에 이르기까지 원자력의 사용에 대해 훑는다. 그런데 이 원자력의 이용엔 핵폭탄뿐 아니라 1952년 원자력 잠수함에서 기인한 ‘아주 안전한 사용방식’인 핵발전도 있다. 석유회사들의 지원을 받은 미국의 반핵활동가들이 고의로 둘을 혼동시켜 원자력 전체를 악마화했다고 감독은 주장한다.

영화는 최악의 원전 사고로 1986년 체르노빌, 그리고 2010년 후쿠시마 사고를 리뷰한다. 체르노빌 사고는 명백히 잘못된 원자로 설계 문제와 위험한 실험 탓이었고, 후쿠시마 사고 역시 쓰나미로 발전기가 물에 잠길 것을 예측 못 한 발전소 설계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뿐이었을까.

영화는 원자력 업계 인사의 말을 빌려 원자력은 다른 에너지 업계와 달리 유일하게 폐기물에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이 주장을 전하며 감독은 하늘로 시커멓게 올라가는 석탄발전소의 연기와 노천에 방치돼 땅을 오염시키고 있는 폐석탄 더미를 편집해 보여준다). 다른 에너지 업계와 달리 원자력 업계가 폐기물까지 책임지게 된 것은 과연 선동으로 공포증에 걸려버린 이들의 호들갑 때문일까. 그만큼 핵폐기물의 위험성이 크기 때문 아닐까.

싸고 값싼 에너지라는 ‘선동’

영화는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지진과 쓰나미로 1만8000명이 사망했다며, 흔히 후쿠시마 원전사고라고 부르지만 원전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어설픈 강제 소개(疏開)로 죽은 노약자가 훨씬 더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영화는 슬쩍 원자력을 청정에너지의 지위로 올려놓는다.

영화가 청정에너지라며 의도적으로 눈감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2011년 사고 이후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돼버린 후쿠시마 주민들의 처지다. 영화는 미국의 원자력발전 이후 나온 폐기물(아마도 고준위 폐기물들) 전체를 한자리에 모으면 월마트 매장 하나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반감기다. 콘크리트 차폐를 하더라도 핵종에 따라서 수십만 년 이상 방사능을 뿜는 것도 있다. 고작 20만~30만 년의 기원을 가진 현생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지도 모르는 인류를 비롯한 후생 생물들에게 이 ‘쓰레기’ 문제를 떠넘기는 꼴 아닌가. 싸고 깨끗한 에너지라는 것, 그 책임을 다 후손들에게 미루고 산정한 비용 아닐까.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줄인다. 기회가 된다면 별도의 기사로 다뤄보고 싶다.

미국 언론·환경단체는 ‘원자력 죽이기’로 석유재벌과 결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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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스톤 감독(사진 오른쪽)이 만든 <뉴클리어 나우>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뛰어나다. 아마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고 ‘설득당할 것’이다. 올리버 스톤? <플래툰>(1986), <월스트리트>(1987), <7월 4일생>(1989), <JFK>(1991)의 그 감독? 맞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받은 세계적 거장이 만든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초창기 환경운동은 원자력발전에 친화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환경단체로 유명한 ‘시에라클럽’ 전 회장 윌리엄 시리는 맨해튼프로젝트 참가자로서 댐 건설이 자연을 파괴한다며 “댐 아닌 원자력” 운동을 초창기에 벌였다고 주장한다(그런데 고색창연한 옛 녹음파일처럼 들리는 윌리엄 시리의 연설 장면은 ‘배우재연’이라는 표식이 달려 있다. 이렇게 편집된 것도 사연이 있어 보인다). 시에라클럽의 ‘친원전 환경운동’은 시에라클럽에서 떨어져 나간 데이비드 브라우어가 ‘지구의 벗’을 만들어 대대적인 반핵운동에 앞장서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영화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 데이비드 브라우어는 누구로부터 후원을 받았나. 로버트 앤더슨. 석유회사 아르코의 회장이다. 영화는 출연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이건 음모론이 아닙니다. 명백한 사업상 거래예요.”

환경단체와 정유회사들이 원자력 에너지로 싸게 전기를 생산해 내연기관을 대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고 사업상 거래를 했다는 주장이다. 이 ‘동맹’엔 뉴욕타임스도 있다. 왜? 1956년 워런 위버가 주도한 위원회 보고서에서는 저선량 방사선, 예컨대 감마선도 인체 건강에 위험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며 방사능의 위험성을 과장했는데, 당시 이 위원회의 배후에 석유재벌인 록팰러재단이 있었고, 뉴욕타임스 발행인도 그 록팰러재단의 이사 중 한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친화석연료 집단은 광고나 성명을 발표할 필요도 없이 언론 지면을 직접 활용해 방사능 위험 선동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상관관계를 인과율로 둔갑시키는 것, 전형적인 음모론 맞다. <JFK> 이후 이 거장 감독의 머리가 한쪽으로만 굳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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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