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을 가장한 인간의 집착과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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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달콤한 고통

한 섬유회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화학자 데이비드 켈시에게는 한가지 비밀이 있다. 회사 근처 하숙집에서 숙식하는 그는 주말이면 늘 병환 중인 어머니를 돌보고자 요양원을 찾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시간을 보내는 곳은 평생의 반려로 점찍은 애나벨과 함께하고자 마련한 신혼집이다. 문제는 애나벨이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는 가짜 신분으로 장만한 집에 틀어박혀 주말 내내 애나벨과 함께 생활한다는 달콤한 공상에 젖어 있다. 그간 애나벨에게 몇 번이나 편지로 절절한 사랑을 고백했다. 답장이 오지 않는 건 아마도 교활한 그의 남편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이토록 달콤한 고통> / 오픈하우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이토록 달콤한 고통> / 오픈하우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960년작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평범을 가장한 인간이 집착과 광기로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드러내는 감정의 파고를 무척이나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데이비드 역시 사이코패스 <톰 리플리> 시리즈로 대표되는 작가의 특기가 그대로 담긴 캐릭터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정, 전도유망한 과학자로서의 면면 뒤에 숨긴 음험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서툰 거짓말과 그릇된 욕망을 통해 정교하게 그 사고방식의 정체를 드러낸다. 데이비드의 행동은 현대식으로 치환하면 명백한 스토킹 범죄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를 순정으로 해석해 모든 걸 정당화하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서늘한 공포마저 안긴다.

데이비드는 애나벨의 두루뭉술한 거절의 신호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편지와 전화로 설득을 반복한다. 그러다 결국 애나벨의 남편 제럴드 앞에서 애나벨을 자신의 아내로 삼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이후 어쩐 일인지 제럴드는 아무도 모르는 데이비드의 비밀의 집에 찾아오고, 우발적으로 몸싸움을 벌이던 중 제럴드는 후두부에 상처를 입고 사망한다. 이때 데이비드는 굉장히 뜻밖의 선택을 한다. 시체를 숨기기보다는 경찰서로 가 과실치사임을 증명한다. 자신은 그와 일면식도 없는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면서. 이후 가공의 신분을 지운 채 잠적한다면 그와 사망자의 관계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쩐지 데이비드에게는 리플리와는 완전히 반대의 미션이 주어진 듯도 하다. 리플리가 교묘하게 다른 신분을 차지한 반면, 데이비드는 뉴마이스터라는 신원에서 반드시 벗어나야만 한다. 더욱이 데이비드는 리플리와 달리 치밀하고 계산적이기보다는 즉흥적이며 다분히 감정적이다. 동료와 이웃에게 해오던 거짓말은 계속해서 균열을 내고, 그를 연모하던 이웃 에피의 협조조차 애써 밀어내기 일쑤다. 특히나 데이비드는 뉴마이스터를 떼어내기로 마음먹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그 인격에 이끌리며 스스로 줄타기를 벌인다. 애나벨과의 결혼을 확신하는 기묘한 욕망이 파국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닥 밑의 바닥을 드러내는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결말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면서 작품의 진짜 핵심을 이룬다.

1955년작 <재능 있는 리플리>의 속편인 <지하의 리플리>가 공개된 것은 1970년이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이 리플리가 시리즈로 도약하는 데 있어 하나의 발판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듯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역시나 보통 사람의 세계에 스며든 범죄자의 기이한 내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명임에 틀림없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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