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도 대한제국이 존재한다고 설정된 평행세계. 제국의 3대 황제 이곤(이민호 분)이 총리 구서령(정은채 분)과 마주 앉은 책상 위에 느닷없이 포장김치가 올라온다. 고구마를 먹는 군주를 보고 “고구마엔 김치죠”라며 황실 근위대장이 정장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이다. 친절한 황제는 포장 한쪽 면에 인쇄된 김치 상표와 제품명만 클로즈업시키는 것으로는 광고주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손수 포장 뒷면까지 돌려서 보여준다. “맛있게 잘 익었네”라며 칭찬도 잊지 않는다.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만으로 <더 킹>의 간접광고 수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나마 잠복 중인 형사들이 차 안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같은 상표의 김치를 꺼내는 모습은 극 전개상 이해할 만한 구석도 있다. 극의 주인공인 황제는 또 다른 간접광고 제품인 커피 음료병을 들고선 “황실 커피랑 맛이 똑같아. 대한민국은 이걸 시중에서 판다고?”라며 감탄한다. 할인마트에서는 술안주용 ‘꼼장어볶음’을 카트에 담고, 또 다른 장면에선 프랜차이즈 치킨 브랜드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네티즌 사이에선 장편 드라마가 아니라 ‘장편 광고’ ‘스토리가 있는 홈쇼핑’이라는 비판이 뒤따르고 있다.
간접광고가 불러온 ‘장편 광고’ 시대
간접광고 덕분에 <더 킹>은 비록 비판의 목소리가 더 크지만 화제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시청률 보증수표’라는 칭호를 얻은 김은숙 작가의 작품답지 않게 초기 회차에서 시청률 10%를 넘어섰을 뿐 이후로는 계속 한 자릿수 시청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TV 방송 속으로 들어온 간접광고의 확대 취지가 본방송 광고에서 이탈하는 시청자들의 눈을 붙잡는 데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름 성공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인터넷TV(IPTV) 등으로 언제든 방송 콘텐츠를 ‘다시 보기’할 수 있게 된 시대의 흐름에 맞춰 광고제품을 더 많이 노출시키고, 제작비도 회수한다는 목적에 맞게 진화한 모습으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의 흐름과 무관한 장면에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간접광고 제품이 좋은 평가를 받기란 쉽지 않다. <더 킹> 외에도 방송 여기저기서 간접광고임을 쉽게 알 수 있게 상품이 나오는 장면을 부각시켜온 한 광고주 업체의 관계자는 “간접광고 노출 이후 소비자들의 평가와 매출에 대해선 말을 아끼겠다”고 짧게 답했다. 다만 보다 많은 노출과 긍정적인 제품 이미지 구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속내는 읽을 수 있었다.
아예 예능·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자들이 대놓고 간접광고 상품이라는 것을 밝히는 추세가 늘어나면서 오히려 정면돌파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지난 4~5월 2부작으로 방영된 SBS의 파일럿 예능 <텔레비전에 그게 나왔으면>은 아예 간접광고를 방송의 주된 소재로 삼아 선보인 프로그램이었다. 광고주가 원하는 대로 제품을 홍보해 높은 평가를 받은 출연자가 이기는 형식으로, 광고 제품과 협찬비용을 기부한다는 명목도 살렸다. 출연자들이 재치를 살려 광고라는 거부감은 줄이고 웃음의 소재로 삼는 모습은 이미 간접광고가 방송 제작에 필요한 ‘필요악’을 넘어 적절한 선에서 ‘윈윈’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준 셈이다.
간접광고로 특정 업체의 상품이 등장하는 것에 익숙해진 시청자들 역시 단지 광고라고 해서 거부감을 보이는 것만도 아니다. 2017년 방영된 tvN의 드라마 <비밀의 숲>은 종영 이후에도 간접광고의 ‘좋은 예’로 꾸준히 회자되는 프로그램이다. 추적극이라는 드라마의 성격에 맞게 등장인물들이 추격 중인 자동차를 놓치자 광고를 위해 등장한 차내 내비게이션으로 추격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거나, 극 전개에 필요한 차량 블랙박스 영상 증거를 광고용 태블릿PC로 쉽게 확인하는 등의 장면은 큰 이질감 없이 극에 녹아 들어갔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스터 션샤인> 역시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맞게 광고상품을 변형시켜 등장시킨 덕에 비판보다는 호평을 받은 경우다.
간접광고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오가기 때문에 실제 프로그램 안에서 이야기 흐름에 최대한 어울리게 광고 제품을 등장시켜야 하는 방송작가들의 고민도 크다. 한 방송작가는 “광고주들은 무엇보다 자사 제품이 강렬하게 부각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플롯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제작진과는 의견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며 “그래도 제작진이 돈을 받는 ‘을’의 입장이어서 최대한 요구를 들어주되 여러 번 광고주 쪽을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규정 넘어선 과도한 노출은 법정제재
방송 프로그램에는 간접광고로 상품이 노출되는 시간이 전체 분량의 5%를 넘기면 안 되는 등의 규제가 존재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규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 웹드라마 등의 영상 콘텐츠로 눈을 돌려 광고 전략을 짜는 광고주나 대행사도 늘었다. 인터넷에서는 이미 종영된 지 오래된 프로그램이라도 황당한 간접광고 사례가 오히려 웃음을 유발하는 코드로 자리 잡아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점에 착안해 광고 노출 방향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전략도 나오는 중이다. 중소 광고대행사를 운영 중인 이지환 대표는 “대기업이 아닌 인지도가 낮은 브랜드 제품일 경우 아예 대문짝만하게 상표가 나와 있는 옷을 입고 출연한다거나 출연자들이 광고 상품으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식의 콘텐츠도 과감하게 만들어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며 간접과 직접을 넘나드는 광고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이런 과감한 시도가 정착된 정도는 아니지만 웃음을 주는 간접광고의 대표적인 사례로 업계 안팎에서 인정받은 경우는 늘고 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등장한 한 햄 제조업체의 간접광고는 당시 푸줏간을 재현한 모습과 잘 어울려 네티즌 사이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재벌로 나온 등장인물들이 결혼 전 상견례를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진행하고, 국산 자동차 제조사의 차량을 수집하거나 중저가 브랜드의 잡화를 쇼핑하는 모습 등은 서로 다른 프로그램의 내용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여 인터넷 ‘밈’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다만 규정을 넘어선 과도한 노출은 법정제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간접광고의 노출 수위를 지키는 것 또한 방송가의 새로운 과제가 됐다. 지난 5월 27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광고심의소위원회는 tvN에서 방영된 <라끼남>에 대해 법정제재(경고)를 의결하고 전체회의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협찬주가 판매하는 라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해 먹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상품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이유에서다. 광고심의소위 관계자는 “각 방송 분량의 상당 부분이 특정 라면을 조리해 먹는 장면에 할애되는 등 협찬주에 광고효과를 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며 “유사한 구성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방송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법정제재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SBS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의 두 주인공이 극중 한 프랜차이즈 치킨점에서 만나 술을 마시고 있다./SBS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