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남은 1899년 도쿄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교육 받은 의사가 되었다. 또 김익남은 대한제국의 ‘의학교’ 교관(교수)으로 복무하며 한국인 학생들을 가르쳐 우리나라 의사의 첫 세대로 길러냈다.
2018년 4월 5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에 새로운 동상 하나가 섰다. 한국 근대의학의 선구자 김익남(1870∼1937)의 동상이다.
한국 출신으로 최초의 서양식 의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재필(1864∼1951)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1892년 워싱턴 DC의 컬럼비안대학교(오늘날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생계를 위해 의과대학 강사와 개업의로 일했던 몇 년을 빼면 서재필은 의사로서보다는 정치가 또는 사회운동가로서 살았다.
한편 한국인 최초의 여성 의사는 김점동(1876∼1910)이다. 본명보다는 미국 유학 시절 썼던 ‘에스더 박’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에스더는 개신교의 세례명이고 미국에서는 남편 박유산의 성을 썼기 때문이다. 김점동은 한양의 선교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오늘날 이화의료원의 전신)에서 활동하던 의사 로제타 홀의 일을 돕다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편과 함께 유학길에 올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고된 유학생활 중 박유산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김점동은 1900년 우등생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보구여관으로 돌아와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1910년 한창 나이에 역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근대의학의 선구자
서재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워낙 유명한 인물이고, 김점동도 여성 과학기술인의 선구자로 부각되면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에 비해 김익남이라는 이름은 아직 생소한 편이다.
하지만 김익남은 한국 근대의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김익남은 1899년 도쿄지케이(慈惠)의원의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교육 받은 의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익남은 대한제국의 국립 의과대학에 해당하는 ‘의학교’의 교관(교수)으로 복무하며 한국인 학생들을 가르쳐 우리나라 의사의 첫 세대로 길러냈다. 이런 점에서 김익남의 역사적 의미는 ‘최초로 한국인을 치료하고 가르친 한국인 근대의사’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익남은 1870년 8월 11일(음력) 서울에서 김원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한의사와 천문학자·수학자 등을 배출한 전형적인 ‘중인 기술직’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김원선이 서자였던 탓에 김익남의 진로에도 많은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의 갑오개혁이 신분제 철폐를 선언하면서 김익남에게도 서출이라는 제약을 넘어설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김익남은 신학문에 뜻을 두고 1894년 관립 일어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하며 유학을 준비했다.
이듬해 정부의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김익남은 중등교육과정을 우등생으로 마치고 1896년 도쿄지케이의원의학교에 입학했다. 지케이의학교의 교수진은 대부분 영국과 독일 등에서 당시 의학의 최전선을 경험하고 돌아온 이들이었으므로, 김익남은 그 시절의 세계적 수준에 뒤지지 않는 의술을 습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899년 7월 30일 졸업(이비인후과 전공)하여,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교육 받은 의사가 되었다.
김익남은 졸업 후 1년 동안 지케이의원에서 당직의원으로 의술을 연마한 뒤, 1900년 귀국하여 곧바로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의학교는 1899년 대한제국의 국립 의학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은 한국에 종두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지석영(1855∼1935)이 맡았는데, 그는 일찍이 한의사 교육을 받았으나 양의 자격은 갖지 않았다. 외국인 교사 자격으로 초빙된 일본인 의사 2명을 제외하면, 김익남이 부임하기 전까지는 교관 가운데 의사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김익남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의학교수였으며 사실상 의학교의 핵심이었다. 그의 학식과 경력도 일본인 교사들을 월등히 능가했다.
의학교는 김익남의 진두지휘 아래 1902년 19명의 졸업자를 배출했다. 한국 최초로 정규교육을 받은 근대식 의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 교육을 담당한 것이 한국인 의사였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가 각별하다. 정치와 외교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던 와중에도 근대로의 전환을 위한 한국인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학교의 제1회 졸업자 중 김교준과 유병필은 졸업 직후 의학교의 교관으로 합류하여 후배들을 가르쳤다.
한국 최초 의사단체 결성 초대회장에
한국인 양의가 매우 귀하던 시절이었으므로 김익남은 여러 가지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대한제국은 국방력 강화를 위해 서양식 군진의료 제도를 확립하고자 했고, 그 책임을 김익남에게 맡겼다. 김익남은 32명의 의사를 양성한 뒤 1904년 의학교 교관을 사임하고 대한제국 육군 군의장으로 전임했다. 1905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군병원인 ‘육군위생원’이 설립되면서 원장을 겸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유린하면서 1907년에는 군대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군대가 사라지면서 대한제국의 군병원도 더 이상 존립할 수가 없었다. 김익남은 명목만 남은 친위부 군무국 위생과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가 의학교에서 길러낸 인맥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익남은 시대의 소명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908년 한국 최초의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의사연구회는 직능단체이기도 했지만, 당시 재한 일본인들이 결성한 ‘계림의학회’(鷄林醫學會)에 대항하는 민족단체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가 1910년 국권을 빼앗으면서 의사연구회도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다.
나라를 빼앗긴 뒤, 일본에서 공부했고 대한제국의 중요한 공직을 역임했던 김익남은 일제의 중요한 포섭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김익남은 일제의 유혹을 물리치고 친일행적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의 견제로 국내 개업에 어려움을 겪어 1919년에는 간도의 용정(龍井)으로 이주하여 개업하기도 했다. 이후 1931년 무렵 귀국하여 개인 진료와 강의 등 의업에 전념하다가 1937년 세상을 떠났다.
김익남의 행적을 20년 넘게 파헤쳐 온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황상익 교수(현재 성신학원 이사장)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근대의학의 선구자 한 명을 더 알게 되었다. 김익남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신분제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한국에 근대의료를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혼란스러운 시대 탓에 그가 뿌린 씨가 풍성한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한국 근대의학의 선구자로서 김익남의 이름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