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돈의 맛
감독 임상수
출연 김강우, 백윤식, 윤여정, 김효진
제작 휠므빠말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15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12년 5월 17일
“재벌이라는 말은 텍스트에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임상수 감독은 강조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세 번 정도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질문은 없었다. 제발이 저렸던 걸까. 5월 17일 개봉한 ‘돈의 맛’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영화다. 영화는 ‘대한민국 최상류층의 숨겨진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이 최상류층이란 다름 아닌 재벌가다.
감독은 ‘아주’ 그리고 ‘노골적으로’ 특정 재벌과 관련된 그럴 듯하게 퍼져 있는 ‘소문들’을 영화에 담았다. 심지어는 개봉 이틀 전에서야 기자시사회를 잡은 것도 ‘그때 그 사람들’(2005) 당시의 박지만씨의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의 ‘교훈’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소송으로 나중에 개봉한 뒤에 영화를 본 사람들은 YH여공사건 등의 자료화면이 빠진, 그냥 검은 화면에 내레이션만 몇 분간 나오는 시작 장면을 봐야 했다. 아니면 특정 재벌가와 관련이 있는 배급망 극장에 걸지 못할지도 못한다는 우려 때문? 그런데 이건 기우였다. 적어도 기자시사회에 참석한 기자들은 별 눈치를 못챈 듯싶다.
영화의 시작 장면. 윤 회장(백윤식 분)은 비서 주영작(김강우 분)을 데리고 ‘돈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은 최첨단 건물의 고층에 있다. 방안에는 달러와 5만원권 다발, 종이가방과 여행용 가방 등이 쌓여 있다. 아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검찰의 고위 간부에게 건네질 ‘떡값’을 챙기러 간 것이다. 뭐 생각나는 거 없나. 본사 건물에 ‘돈이 쌓여 있는 방’이 있다고 지목되어 압수수색당했던 모 재벌. 그리 먼 옛날 이야기도 아니다. 이 재벌가에 근무했던 전직 변호사의 책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그 방. 비록 뒤늦은, 혹은 시늉만의 압수수색으로 그 방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또하나 눈길을 끈 캐릭터가 있다. 엔딩크레딧에 보면 ‘늙은 하녀’라고 이름 지어져 있던데(늙은 하녀 역은 김보민씨가 맡았다), 윤 회장 주위에서 출몰하는 노 회장을 보필하는 역이다. 이 역시 특정 재벌 직원들은 실제로 거의 목격한 적이 없다는 그룹의 모 상무가 연상된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 ‘하녀’(2010)의 또다른 변주다. 임 감독의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하녀(1960)의 리메이크라고 하지만, 사실상 주제와 이야기의 뼈대만 남기고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채운 영화다. 오리지널 하녀의 남주인공은 한국전쟁 후 시골에서 상경한 여직공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계를 잇는, 위태위태한 가부장적 근대화의 수혜자다. 오리지널 하녀의 흔적은 아침마다 베토벤을 피아노로 그럴듯하게 치는 이정재 캐릭터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오리지널과 리메이크 하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을 듯싶다. 어쨌든 ‘돈의 맛’은 이번에는 ‘비서’(정확히 말하면 ‘집사’ 정도?)의 눈을 통해 이 그로테스크한 상류층 가족 이야기를 끝가지 전개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은 듯하다. 그런데 주인공의 성별만 바꿨는데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스토리가 담고 있는 전복성은 사라지고 밋밋하고 단선적인 교훈극만 남는 것 같아 신기하다. 그로테스크한 느낌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전복성은 김기영 감독의 오리지널 하녀가 제일 강했고, 리메이크를 거듭하면서 점차 희미해진다.
영화에서 전작 ‘하녀’와 연결고리로 삼고 있는 것은 이혼녀 ‘나미’다. 전작 하녀를 본 사람은 기억하고 있겠지만, 쌍둥이 동생의 언니의 이름이 그 ‘나미’다. 감독은 “어린 시절 하녀가 불에 타 죽는 걸 목격한 나미가 성장하면 어떤 생각을 안고 살아가게 될까”라는 물음 아래 만들어낸 캐릭터라고 말했다.
글쎄. 월급쟁이 늙은 하녀와 이제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서 삶을 연명하면서도 욕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노 회장의 쌍은 백 회장 부부와 필리핀 하녀를 매개하여 나미와 주영작의 관계에 대칭한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TV 통속극적 결말처럼 보이지만, 이 시점에서 또 신분을 초월해 결혼한 것으로 유명한 그 재벌 일가 따님의 이야기가 오버랩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인 듯싶다.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질문에 감독은 답했다. “만국의 월급쟁이여 단결하라!” 그런데 영화로 밥먹고 사는 기자들도 은밀히 불어넣고 있는 그 ‘선동’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 ‘샐러리맨 연대’에 앞선 문제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