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다큐에서 못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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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인기 다큐에서 못다한 이야기

기록의 힘, 증언의 힘
정길화 지음 | 시대의창 | 1만3500원

<인간시대> <신인간시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인기 다큐를 제작한 정길화 PD가 다큐에 대한 단상을 묶은 책이다. 그동안 다큐를 만들면서 만난 많은 사람과 촬영 현장에 대한 뒷이야기도 실려 있어 재미를 더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보도연맹’(1950년 한국군이 보도연맹원과 양심수를 포함해 20여만 명을 살해했다는 민간인 학살 사건)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을 때 마지막 증언자가 되어줄 장석윤씨를 만난 사건이다. 장씨는 1950년 6월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있었는데, 그해 6월 28일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명령은 치안국장 명의로 발송됐다. 장씨는 보도연맹 사건의 핵심 증인으로 사건의 의혹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였다. 하지만 정 PD가 2001년 장씨를 찾아갔을 때 그는 97세 노인이었다. 당시의 일에 대해서 물어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정 PD는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만나면 그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얼마 후 장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씨는 이승만 정권 때 주요 보직을 맡은 사람 가운데 드물게 독립운동의 전력을 가진 이였다.

정 PD는 그때의 아쉬움에 대해 “심전(心田)이 움직였다면 진솔한 토로를 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당시에 예비검속을 어떻게 집행했는지 사실관계만 좀 설명해주세요’라고 무릎을 꿇고 간곡히 호소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저자는 이런 예를 들면서 기록과 증언의 힘에 대해 강조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역사의 단초는 기록에서 출발한다. 후대의 사가와 다큐멘터리스트는 여기에서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지금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말했다. 기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되어 있다. 1장 ‘기록의 힘, 증언의 힘’에서는 다큐를 촬영하면서 경험했던 기억을 단초로 다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2장 ‘지상파 방송과 미디어 공공성’에서는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미디어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상파 방송을 둘러싸고 있는 미디어 환경, 그리고 지상파 방송에 가해지고 있는 ‘방영금지가처분’ ‘검열’ 등 다양한 압력을 비판했다. 특히 ‘지상파 독과점’에 대한 허구성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반박했다. 3장 ‘어느 다큐멘터리스트의 다큐멘털리티’에서는 다큐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는 경제가 어렵다고 다큐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4장 ‘생활과 생각’에서는 그가 만났던 사람, 읽었던 책, 그리고 소소한 일상에서 끄집어낸 통찰을 느낄 수 있다. 대기자 김중배,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와 인연, 마이클 크라이튼에 대한 추억 등을 유려한 필체로 그려내, PD가 아닌 작가로서 필력도 맘껏 뽐냈다.

방송인으로 살아온 지 25년 만에 처음 발간하는 단독 명의의 책으로, 불투명하고 혼란한 미디어업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특히 TV 다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네껜> <인간시대> 등 프로그램의 궤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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