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동성결혼 반대하는 것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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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법원은 동성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그들의 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더라도, 사실혼 관계까지 부정하는 것은 분명한 차별이라는 것이다. 이제 동성결혼에 관한 진지한 논쟁이 시작돼야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동성부부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동성부부 김용민·소성욱씨가 지난 7월 1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조태형 기자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동성부부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동성부부 김용민·소성욱씨가 지난 7월 1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조태형 기자

동성결혼의 쟁점

현대 민주주의의 법적 원리에서 곧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예컨대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볼 것인지 말 것인지, 마약이나 성매매를 허용할 것인지, 국내 체류 외국인에게 어떤 권리를 보장할 것인지 등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그래서 정치적 논의의 결과에 따라 전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유럽은 국가마다 성매매에 관한 법 제도가 다르고, 미국의 이민자 정책은 선거 결과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반면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줄 것인지, 피부색에 따라 같은 권리를 보장할 것인지 따위는 애초에 쟁점 자체가 될 수 없다. 차별을 인정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동성결혼 법제화는 선택의 문제인가,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인가?

동성결혼 법제화에 관한 논쟁은 나라마다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됐지만, 반대 입장의 핵심 논리는 대부분 비슷하다. 결혼이라는 법적 개념의 정의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므로 동성결혼은 개념적으로 인정될 수 없고, 법제화하지 않더라도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리 자체에는 별문제가 없다. 결혼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지는 선택의 문제이므로 기존의 정의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현행 헌법이 결혼을 이성 간의 결합으로 정의한다고 하더라도, 관련 조항을 바꾸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정의하든, 두 사람 간의 결합으로 정의하든 민주주의의 원칙은 침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개념의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권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보장돼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다. 누군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면, 이는 분명한 차별이다. 따라서 국가가 전통적 결혼 개념을 유지할 것이라면, ‘생활동반자’나 ‘동반계약’ 같은 새로운 법적 개념을 도입해서라도 권리의 평등을 실현해야만 한다.

결국 동성결혼 법제화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의 논리는 허약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명칭을 바꾸기만 해도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즉 ‘결혼’ 대신 다른 개념을 사용해서 동성 커플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자는 주장을 거부할 수 없다. 이때 논쟁은 다음 단계로 이행한다. 전통적 결혼제도를 유지한 상태에서, 예를 들어 ‘동반계약’이라는 이름의 포괄적 파트너 제도를 신설한다고 상상해 보자. 결혼한 이성 커플과 동반계약을 한 동성 커플 사이에 중요한 권리의 차이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제도적 차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두 가지 제도가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도록 설계돼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같은 제도를 이름만 다르게 부르는 꼴이 된다. 그럼 굳이 두 가지 제도를 분리할 이유가 무엇인가? 차라리 기존의 결혼 개념을 바꿔 이성 커플과 동성 커플을 모두 포괄하도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동성부부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동성부부 김용민·소성욱씨가 지난 7월 1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조태형 기자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동성부부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동성부부 김용민·소성욱씨가 지난 7월 1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조태형 기자

프랑스는 실제로 이런 논리 전개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동성결혼을 법제화했다. 1997년 법원이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전통적 해석을 재확인하자, 1999년 의회와 정부는 동성 커플과 이성 커플을 모두 포괄하는 ‘연대성 시민 계약’(PACS)이라는 새로운 파트너 제도를 민법에 추가했다. 하지만 결혼과 PACS는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설계됐고, 두 제도 모두에 접근 가능한 이성 커플과 PACS에만 접근 가능한 동성 커플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결국 오랜 논쟁 과정을 거쳐 2013년에 동성결혼이 법제화됐다.

민주주의에 대한 무관심

이제 앞서 던졌던 질문의 답을 알 수 있다. 결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이성 커플과 동성 커플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따라서 정치적 논쟁의 합리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곳이라면, 동성결혼에 관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법제화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1세기 국제사회에서 동성결혼 인정 여부가 민주주의 발전의 척도처럼 간주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 동성결혼 법제화는 아직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물론 직접적 원인은 극우 종교 집단의 영향력에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평등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성결혼의 법적 지위를 인정한 나라들은 수십 년에 걸친 격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과연 한국에서 수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 문제를 두고 다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될까? 결과는 둘째치고, 그러한 싸움 자체가 일어나긴 할까?

이번 대법원판결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일반적인 무관심이다. 다행히 몇몇 국회의원이 동성부부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지만, 국회에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임신중단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거대 양당은 앞으로도 ‘법원의 판단을 지켜보겠다’는 식의 소극적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임신중단과 동성결혼이라는 주제는 좌파와 우파, 리버럴과 보수를 구별하는 첫 번째 기준으로 작동해왔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이념 차이에서 정치 세력의 차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의 거대 양당은 늘 싸우지만, 이념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누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지가 중요할 뿐이다.

이는 단지 정치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사회적 폭력에 거친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은 많지만, 감각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구조적 폭력과 차별에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없다. 성폭력 사건이 터지면 모두가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지만, 성불평등 구조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극소수다.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이 중대재해처벌법의 밑거름이 됐지만, 노동시장의 불평등과 불안정 노동에 관한 정치적 논의는 여전히 미미하다. 동성결혼에 대한 일반적 태도를 규정하는 것도 절대다수의 무관심이다. 사실 그것은 차별에 대한 무관심,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대한 무관심이다. 앞으로 동성결혼에 대한 정치적 논쟁은 어떤 형식으로 전개될까? 애초에 그런 논쟁이 벌어지기는 할까? 이 질문에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정도를 평가할 기준이 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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