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가족을 이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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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감소 문제의 어려움 중 하나는 원인을 특정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흔히 불안정 노동과 주거, 사회경제적 불평등, 높은 양육 비용, 열악한 돌봄 서비스, 성불평등, 사교육 부담 등을 원인으로 꼽는데 나열된 것 하나하나가 저출생만큼이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은 서로 긴밀히 얽혀 있는 다른 원인에서 비롯한다. 그 원인들의 원인들을 계속 찾다 보면, 결국 한국의 모든 것이 저출생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뿐이다. 흔히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법이 유용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제 다른 관점의 질문이 필요하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관계 맺음의 피곤함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저출생 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전제돼 있다. 아이를 낳고 싶은 개인이 많지만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그들의 바람을 차단하고 있으며, 그런 조건을 개선할 국가 정책이 시행되면 출산율이 올라가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열악한 사회 조건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인가, 아이를 낳고 싶은 열망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열악한 사회 조건이 바뀌지 않는 것인가?

참고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자. 합계출산율뿐 아니라 혼인 비율도 동시에 떨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0~34세 인구 중 결혼을 하지 않은 비율이 2000년에는 18.7%였지만, 2020년에는 56.3%로 상승했다. 2021년 퓨리서치센터 보고서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했는데, 오로지 한국인만 물질적 풍요를 1위로 꼽았다. 2위는 건강, 3위가 가족이었다. 작년에는 가구 기업 이케아가 가족생활에 대한 글로벌 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다. 한국인 응답자 중 14%만이 ‘함께하는 사람들과 웃는 것이 집에서의 생활에 즐거움을 준다’라고 답해 조사 대상 38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가족과 좋은 관계가 집에서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18%, ‘자녀나 손주를 가르치며 자긍심을 갖는다’고 답한 비율도 8%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모두 세계 최하위다. 반면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집에서 생활하는 데 가장 큰 즐거움을 준다’고 답한 비율은 40%로, 세계 1위다.

결혼 비율과 합계출산율은 별도의 문제이고, 가족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의견은 확연히 다르지만, 방금 언급한 수치들에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일반적 경향 한 가지는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을 이루어 함께 사는 것의 중요성이 점차 약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가족의 위기’ 같은 상투적 표현으로 설명되는 현상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 내에서의 인간 관계, 친구나 동료 사이에 형성되는 친밀성의 관계, 타인과의 계약 관계, 공적 공간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 시민과 시민 사이의 정치적 관계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관계 맺음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갈수록 관계 맺음 자체를 회피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관계의 곤란함은 근대 세계의 일반적 특성이지만, 그럴수록 가족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가족이야말로 그런 곤란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안정적인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족은 휴식과 신뢰의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유형의 피로가 쌓이는 공간으로 여겨진다(이를 ‘개인주의 강화’ 따위로 설명하는 것은 무지한 소리다. 개인주의란 사회적 관계의 기본 단위를 개인으로 전제한다는 것이지, 관계 맺음을 회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에서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부모, 즉 자식의 계급 상승 또는 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를 찾기는 쉽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한 가족’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족이라는 인간 관계 자체를 삶의 가장 기초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다수일까? 지금 시급히 필요한 것은 가족 자체에 관한 질문이다. 즉 개인이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부장제를 대체할 가족 질서의 부재

가부장적 전통 사회에서는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이 존재했다.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남성의 존재 이유 같은 것이었다. 가부장이 되지 못한 남성은 남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여성이 비혼 상태로 혼자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노동시장과 가족제도 전체가 가사노동, 출산, 양육, 돌봄의 부담을 떠안은 하위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재생산했다. 개인에게 행사되는 가부장적 권력이 곧 가족 구성과 출산의 이유이자 동력이었다.

근대 사회는 그런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민법적 계약으로 정의되고, 개인의 고유한 행복이 가족 구성과 재생산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기쁨이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또한 가족은 인간 자체를 재생산하는 일차 공간이라는 점에서, 가족-사회 관계와 가족-국가 관계를 적절히 관리하는 것이 공동체 유지의 필수 조건이 된다.

그런데 한국에 과연 근대적 가족, 근대적 가족-사회-국가 관계가 수립된 적이 있는가? (박정희식 가족 정책은 국가 동원 체제의 일부일 뿐 ‘가족의 근대화’라고 볼 수 없다.) 한국의 근대화는 형식적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과 파괴적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두 축으로 진행돼왔다. 근대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 민주주의 정치 공동체와 시민성, 시민적 권리의 실질적 보장, 근대적 사회 관계와 가족제도 등은 진지한 고려 대상도 되지 못했다. 그 결과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약화했을 뿐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을 대체할 가족 질서는 여전히 부재하다. 그래서 한편에는 가부장제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성이 수두룩하고, 다른 한편에는 그런 망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사이 ‘부자 되기’의 논리가 가족 관계까지 집어삼키면서 결혼은 자산 증식의 한 수단이 돼버렸다.

한마디로 한국에는 근대적 가족 모델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개인과 개인이 만나 어떤 가족을 만들 것인지 합의하기 어렵고, 국가는 결혼하고 애 낳으면 돈 주겠다는 식의 정책만 쏟아낸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가족-사회-국가 관계의 일관된 모델에 따라 모든 것을 동시에 개선하는 작업이다. 모델 수립을 위한 노력 없이, 문제가 되는 것을 나열하고 각각의 해결책을 찾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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