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령대 놀이터’ 만든 서민우·지정우 EUS+건축사무소 소장
서울 답십리동에 있는 재학생 480여명 규모의 동답초등학교. 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왼편 운동장 쪽을 바라보면 특이하게 생긴 ‘구조물’이 보인다. 과거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호령하던 구령대(조회대)를 개조해 만든 ‘구령대 놀이터’다. 동답초 구령대 놀이터는 여러 차례 각종 미디어에 소개되며 유명세를 치렀다.
“그래, 학교를 어떻게 바꿔줄까?” 이유에스플러스(EUS+)건축사무소의 서민우·지정우 소장이 학교 의뢰로 아이들을 만난 건 2017년이다. “여긴 아무도 안 쓰는데 바꿔주세요” 며칠 동안 아이들과 만나 학교를 돌아다닌 끝에 아이들이 가리킨 곳이 바로 구령대였다. 구령대 놀이터는 아이들과 선생님과 건축가가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구령대 놀이터는 아동이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한 놀이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구령대 놀이터를 계기로 서민우·지정우 소장은 꾸준히 아동 친화 공간에 대한 관심을 갖고 관련 작업을 벌여오고 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보다는 아이들에 ‘의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청소년·청년 등을 포함한 ‘다음세대’를 위한 공간 조성이 필요하다는 것. 이런 생각을 품는 ‘아빠’이자 건축가인 서민우·지정우 소장을 만났다. 서 소장은 지난 1월 25일 서울 정동 사무실에서, 해외 체류 중인지 소장과는 줌(Zoom)을 통해 원격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도시가 어느 특정집단을 위한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누리고, 삶의 질을 높이는 교육과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굳이 ‘아동친화도시’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어린이 놀이공간, 혹은 어린이를 위한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있는지요.
서민우(이하 ‘서’) “건축가의 작업으로 시작했다기보다는 아이를 키우면서 놀아주고 대화하고 문화 경험을 같이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딸과 다양한 도구와 재료를 사용해 뭔가를 만들거나 그렸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아이가 생각하는 방식을 읽어내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귀국 후 사무실을 연 뒤 처음 추진한 프로젝트가 바로 동답초 구령대였습니다. 아이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프로젝트가 좋은 결과물을 낳았고, 이후 나름 사명감을 느껴 본격적으로 다음세대를 위한 공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지정우(이하 ‘지’) “외국에서 생활하며 아이를 낳았는데, 생후 3개월부터 아이를 어린이집(데이케어센터)에 보냈습니다. 아침 7시에 내려주고 저녁 6시에 데려오는 생활을 유치원 가기 전까지 매일 했지요. 매일 아침 같은 데이케어에 늘 들어가기 싫어하며 우는 아이를 보고 여러 고민이 들었습니다. 아이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부모와의 생활과 급격히 단절되는 공간이 내내 적응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이 공간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회자하는 ‘구령대 놀이터’는 다시 봐도 인상적입니다. 왜 구령대가 선택됐을까요.
서 “당초 프로젝트 이름은 ‘동답초 놀이터를 바꿔라’였습니다. 하지만 장소 자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게 됐죠. 구령대는 대개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고, 눈에 잘 띄지만 학교들이 안전사고를 우려해서 접근을 막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단절된 공간이 아이들의 생각으로 새롭게 재탄생한 것입니다. 일상적 공간을 재활용한다는 의미도 중요했습니다.”
지 “구령대 자체가 권위주의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군대의 ‘연병장’ 개념에서 나온 것이지요. 일사불란하게 1000명이 넘는 학생을 통솔하기 위한 구조물이고요. 지금은 저출생으로 학교가 비어가는 시대입니다. 학교도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고요. 여러 차례 아이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면서 구령대의 기존 이미지와 아이들의 인식, 변화를 통해 이뤄낼 수 있는 잠재성 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내 건축·도시계획 과정에서는 아동 친화적 공간 개념이 부족합니다.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서 “아동친화적 공간의 가장 피부에 닿는 사례는 역시 놀이환경이겠죠. 사실 놀이공간의 생성과 발전과정 자체가 그렇게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놀이터를 만든다고 하면 ‘건축가가 무슨 놀이터냐’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아직까진 인식과 발상의 전환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젊은 건축가들이 아동과 관련된 건축설계나 도시계획 분야에 최근에 많이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기에 좋은 환경이 마련되리라고 믿습니다.”
지 “우리의 도시와 건축은 좋든 싫든 ‘역동적인 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광역버스를 한번 타기 위해 몇미터, 몇십미터를 우르르 몰려가서 타야 하는 ‘각자도생 사회’에서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긴 어렵겠지요. 지하철과 전철, 광역급행철도(GTX)를 촘촘하게 하는 것보다 각 지역 특성에 맞는 개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동성의 속도 조절이 가능하고, 다음세대에 친화적인 도시를 만들어갈 여지가 생깁니다. 최근 건축계엔 ‘카페 건축’이란 말이 있습니다. 서울에선 ‘000길’이 유행하죠. 모두 현재를 소비하기 위한 공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도시의 경우 아파트단지 위주의 주거 형태도 영향이 큽니다. 잘 조성된 단지의 경우 내부는 좋겠지만 외부와는 단절되고 분절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두 분이 생각하는 ‘아동친화도시’란 어떤 개념입니까.
서 “도시가 어느 특정집단을 위한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제, 인구, 문화, 교육 등 다양한 시스템이 촘촘히 잘 짜여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아동친화’라는 개념 역시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를 뿐, 어느 도시든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동을 배려한 공간과 정책, 재정적 지원과 투자는 분명히 출생률의 증가에 영향을 주겠지요. 다만 어른들도 아이들도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누리고, 삶의 질을 높이는 교육과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굳이 ‘아동친화도시’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갈등 구조 속에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스며 있는 우리 방식의 도시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세대의 참여는 필수적입니다. 다음세대를 ‘위한’ 공간 개념을 넘어 다음세대에 ‘의한’ 공간이 돼야 합니다.”
지 “제가 생각하는 아동친화도시 역시 제대로 된 ‘도시’ 그 자체입니다. 별다른 수식어 없이 모두에게 포용·배려적이어야 합니다. 가장 어린 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시스템과 역사, 갈등 구조 속에서 사람들에게 배려가 스며 있는 우리 방식의 도시를 조금씩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음세대의 참여는 필수적입니다. 도시를 누군가 만들어주는 대로만, 주어진 대로만 써야 한다면 재미없고 답답한 일일 겁니다. 다음세대를 ‘위한(for)’ 공간 개념을 넘어 다음세대에 ‘의한(BY)’ 공간이 돼야 합니다.”
-다음세대를 위한 공간 조성에 필요한 정책이나 제도, 혹은 지원책은 무엇이 있을까요.
서 “건축 교육 내지는 공간교육이 적어도 중등교육과정에서부터 다뤄지는 교육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구성원들이 건축과 공간에 대한 지식과 소양이 갖춰져 있으면 분명히 그 사회는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보다는 발전된 환경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건축이라는 것은 예술이나 기술 행위를 넘어 인문·철학·수학적 소양과 이해를 길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새마을운동같이 시간을 압축해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정권이 달라져도 일관성 있게 제도적·예산적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 “우리 도시 구조와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는 한국의 저출생 문제와도 연관이 깊습니다. 연구 과정에서부터 ‘다음세대 도시 공간 워크숍’ 같은 참여 공간을 만들어 젊은 세대와 신혼부부 등이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도시가 탄생하거나 변화하는 것을 볼 때 아이를 낳을 생각도 하게 되고, 도시 안에서 그 가족만의 ‘공간 서사(스토리텔링)’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야 조금씩 도시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도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요. 육아프로그램이나 ‘금쪽이’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낄 게 아니라 나와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세상이 되길 기대해봅니다.”
-향후 활동계획과 방향성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서·지 “저희 둘 다 실무와 교육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다음세대 공간’에 초점을 맞춰 프로젝트 실무 경험을 학생들과 나누기도 하고, 학생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사무실 프로젝트에 구현하는 작업을 계속 진행할 계획입니다. 과거 수행한 어린이 관련 건축과 놀이터 조성 경험 등을 종합해 책으로 낼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건축이 과연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해법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폐교된 지방 대학교 등의 경우 물질적인 인프라는 이미 구축이 돼 있습니다. 이런 대학 공간을 지역 주민을 위한 도서관이나 박물관, 복합문화공간 등으로 바꾼다면 인구 유입이나 도시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