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상 범죄인데 수사기관에 허용하는 ‘규정’ 충돌…입법적 개선·법원 개입 등 필요
문화예술인연대회의는 지난 1월 12일 경찰수사를 받다가 사망한 배우 이선균씨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경찰의 무분별한 피의사실공표로 인해 이씨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비판 여론이 거센 상황이다. 연대회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정부와 국회에 이렇게 촉구했다.
“형사사건 공개 금지와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를 위한 현행 법령에 문제점은 없는지 점검하고, 필요한 법령의 제·개정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피의자 이권과 국민의 알권리 사이에서 원칙과 예외가 뒤바뀌는 일이 없도록, 수사당국이 법의 취지를 자의적으로 해석·적용하는 일이 없도록 명확한 입법적 개선이 필요하다.” 연대회의는 성명서를 국회의장실에 전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최정화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는 이른바 ‘이선균 방지법’ 제정을 언급했다. 이후 최 대표는 지난 1월 18일 주간경향과 e메일 인터뷰에서 “속칭 ‘이선균 방지법’은 피의사실공표죄가 사문화되다시피 한 점을 넘어 ‘수사기법화’ 돼 가고 있는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라며 “현재 수사기관의 훈령이나 규칙으로 피의사실공표죄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피의사실을 흘린 자들을 직접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적 보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대회의 성명서와 최 대표의 말에는 피의사실공표 실태와 개선 방향이 함축돼 있다. 형법 제126조는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 행위를 금지한다. 하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으로 여겨진다. 지난 70년 동안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기는커녕 기소된 사례조차 없기 때문이다. ‘식물 조항’이라 불릴 정도다. 그렇다고 피의사실공표죄를 폐지하는 게 답은 아닐 것이다. 해당 죄가 존재함으로써 무차별적인 피의사실공표를 억지하는 효과를 간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피의사실공표죄의 실효성과 규범력을 높이기 위해 법률을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법원이 개입하는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다. 무엇보다 피의자의 인권과 시민의 알권리 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대책이 무엇인지, 폭넓고 심도 있는 사회적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법무부·경찰청 공보 규정, 법적 근거 없어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형법이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피의자의 인격권 등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민감한 피의사실이 공개되면, ‘여론 재판’에선 이미 유죄가 확정된 것처럼 다뤄진다.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은 의미를 잃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상실될 우려가 있다.
피의사실공표죄는 검사와 경찰 등 범죄수사 직무를 수행하거나 이를 감독·보조하는 사람이 피의사실을 기소 전에 공표하면 처벌된다. 주목할 점은 피의사실공표죄의 예외가 없다는 점이다. 조항만 놓고 보면 모든 피의사실공표는 처벌받게 된다. 그런데 법무부와 경찰청은 내부 훈령을 통해 피의사실공표의 예외를 규정하고 공보 활동을 하고 있다. 법적인 근거가 없이 내부 행정규칙에 근거해 공표행위가 이뤄지는 건 문제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법무부는 2010년 1월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 공보준칙’을 제정했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수사를 받던 도중 서거한 게 계기가 됐다. 현재는 ‘형사사건 공보에 관한 규정’이란 명칭으로 운영한다. 여기에는 “사건관계인의 명예, 사생활 등 인권, 무죄추정의 원칙,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국민의 알권리, 수사의 효율성 및 공정성이 균형을 이루도록 적용돼야 한다”라며 운영 원칙이 명시돼 있다.
훈령은 원칙적으로 기소 전에 피의사실공표를 금지한다. 한데 예외가 많다.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가 존재하거나 발생할 것이 명백한 경우’, ‘중요사건으로서 언론의 요청이 있는 등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 경우’ 등 6개 사항이다. 이런 예외 사유의 개념이 모호해 검찰이 자의적 판단에 따라 피의사실공표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둔 것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중요사건’의 범위 또한 넓다. ‘공소시효가 임박한 사건’, ‘내란, 외환, 대공, 선거, 노동, 집단행동, 테러, 대형참사, 연쇄살인 관련 사건’, ‘판사 또는 변호사의 범죄’, ‘국회의원 또는 지방의회의원의 범죄’, ‘공안사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등이 여럿 있다. ‘특히 사회적 이목을 끌 만한 중대한 사건’도 포함되는데, 이 또한 자체 해석에 따라 고무줄처럼 적용될 여지가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검찰이 일부 피의사실공표죄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러한 수사기관의 내부 공보규칙을 예외, 즉 위법성 조각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검찰은 2020년 7월 울산경찰청 소속 경찰관 2명을 피의사실공표 혐의로 수사한 뒤 기소유예 처분했다. 혐의는 인정되지만, 여러 사정을 참작해 기소하지 않은 것이다.
이성기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2021년 6월 ‘피의사실공표죄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이 사건의 불기소 결정문을 분석했다. 검찰이 피의사실공표의 위법성 조각 사유를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서 도출했고, 정당행위 성립 여부를 구체적으로 판단할 때 수사기관의 공보규칙을 근거로 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수사기관의 규칙을 피의사실공표의 근거로 삼을 경우 수사기관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구성요건 창설의 가능성으로 인해 앞으로 피의사실공표죄가 계속 사문화된 채 규범성을 상실하게 될 우려가 크다”고 짚었다. 수사기관의 내부 규정은 수사기관이 자체적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의사실공표죄의 처벌 기준으로 활용하면, 피의사실공표죄의 성립 요건을 수사기관 마음대로 설정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검찰은 또 피의사실공표와 관련한 민사소송의 대법원 판례도 참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의사실공표죄로 기소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형사판례는 없다. 다만 피의사실공표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 민사판례는 몇 건 존재한다. 피의사실공표의 위법성 조각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공표 목적의 공익성, 공표 내용의 공공성, 굥표의 필요성, 피의사실의 객관성 및 정확성, 그 표현 방법, 침해되는 이익의 성질 및 내용 등을 두루 고려해야 한다는 게 판례 내용이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도 2019년 5월 법무부의 공보규정에 담긴 예외 사유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며 “법률상 범죄로 규정된 피의사실공표죄가 존재함에도 수사기관이 피의사실공표를 허용하는 규정을 둔 것은 법체계상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정리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법제처는 2018년 11월 ‘인권보호를 위한 행정규칙 정비’ 과제 14건을 발표했다. 법무부와 경찰청의 형사사건 공보 관련 훈령도 포함됐다. 법제처는 “형법상 공판 청구 전 피의사실공표가 금지되고 있음에도, 법률상 근거 없는 행정규칙에 근거해 피의사실공표가 이뤄지고 있다”며 2021년까지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뤄지지 않았다.
■피의사실공표 법률 정비해야
피의사실공표와 관련한 법률을 손질해야 한다는 견해는 학계와 시민사회 등에서 줄곧 제기돼 왔다. 피의사실공표죄는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취지인데, 국민의 알권리 및 언론의 자유 등의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또 피의사실공표가 논란이 되는 건 허용과 금지의 경계가 불명확하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준이 없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이 때문에 피의사실공표의 예외 사유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법률 제·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행보다 피의사실공표죄의 규범력을 강화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리란 평가가 있다. 김재현 오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재직 시절인 2019년 9월 펴낸 ‘피의사실공표죄의 합리적 적용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피의사실공표죄의 사문화는 공보와 피의사실 및 위법성 조각 사유 사이에 얽힌 법리와 명확하지 못한 기준들도 적지 않은 원인이 됐을 것”이라며 “명확한 기준 제시를 통해 공표의 내용과 범위를 설정하는 게 규범력을 회생시키는 데 가장 중요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예외의 기준과 범위를 어느 선까지 둘 것인지가 핵심 쟁점이 된다. 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2019년 9월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 관행 방지를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피의자의 인권과 국민의 알권리 관계를 고려해 보다 조화롭게 개정해야 한다”라며 “피의사실이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중대한 범죄로 인해 공익적 목적이 있거나 피의자가 공적 인물인 경우 우선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피의자의 기본권 보장과 관련한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사 과정에서의 일반적·절차적 사항은 공표가 가능토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봤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한 교수는 통화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구속영장 청구나 압수수색의 사실 등 일반적·절차적인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런 점들은 실제 법정에서 잘 다투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은 착오가 생길 여지가 없다. 중요한 건 진술과 증거 내용이다. 가장 민감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지 않나. 어떤 맥락이나 관점에서 해당 진술을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뒤바뀔 수 있다. 증거도 위법하게 수집됐거나 ‘전문 증거’(타인에게 전해 들은 말)일 수도 있다. 법원이 심리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 진술이나 증거가 진위 확인도 없이 공개되면 편견과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피의사실공표 여부를 결정할 때는 수사기관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외부의 통제를 받는 방법이 거론된다. 이성기 교수는 “피의사실공표에 관한 구체적인 판단은 시민이나 전문가가 참여해 결정하는 시민참여 방식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공표 기준은 피의자의 명예 보호, 무죄추정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기초해 구체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들을 절대적 금지사항으로 규정해야 한다”라며 “이 외의 정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범죄의 중대성, 혐의의 명확성, 범죄예방을 위한 필요성과 공표의 목적과 수단의 적합성, 공표 내용의 최소 침해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피의사실의 개념과 범위도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범죄사실의 뼈대는 아니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범죄사실과 관련한 내용’ 가운데 어느 수준까지 피의사실로 봐야 할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허위 내용을 피의사실이라며 공표하면 가중처벌하는 방안도 언급된다.
공표 행위도 마찬가지다. 수사기관이 언론에 개별적으로 ‘흘리는 행위’도 공표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누설’과 ‘유출’ 행위도 금지토록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과거 국회에서도 이런 개선책 등이 담긴 형법 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최근에는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29일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피의사실공표죄와 관련해 21대 국회에서 제출된 첫 법안이다. 개정안에는 피의사실공표를 금지하는 내용은 유지하되, 공표가 가능한 예외 사유를 신설했다. ‘압수, 수색, 체포, 구속된 사실’, ‘기타 일반적·절차적 사실로서 재판의 실체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는 사실’ 등 4개다.
피의사실공표의 금지와 허용 사유, 공표 절차 등을 망라한 ‘수사공보에 관한 법률’(가칭)을 제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온다. 이를 위해 범정부 차원의 ‘수사공보 제도개선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2019년에 권고한 바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법센터는 지난해 12월 29일 논평을 내고 “피의사실공표 등 위법·부당한 수사관행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라며 ‘수사절차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백민 변호사(민변 사법센터 검경개혁소위원회 간사)는 통화에서 “수사기관마다 각자 다른 공보 규정이 있는데, 수사 절차와 관련한 공보와 인권보호 등 각종 규정을 하나로 통합해 어느 수사기관이 수사를 하든 공통으로 지킬 수 있는 절차법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앞서 ‘이선균 방지법’의 필요성을 언급한 최정화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는 “법률적 검토나 준비는 민변과의 협조를 도모하고 있고, 기자회견을 본 이후 여러 법조인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연락을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입법적 사안이기 때문에 국회의원들과 공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라며 “이번 사안은 정파적인 접근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여야 의원실과 함께 단계를 밟아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 대표는 “단기간에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끈기를 갖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선을 다해 입법적 보완을 이뤄내도록 할 것”이라며 의지를 보였다.
■법원이 개입해야
이렇게 법률을 정비하더라도 수사기관이 엄정한 수사를 통해 기소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 때문에 법원이 개입하는 제도가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공정한 재판을 받기 위해 피의자 등이 수사기관의 공표·발표를 금지하도록 법원에 신청토록 하는 방안이다. 법원의 피의사실공표 금지 명령을 수사기관이 어기면 처벌토록 한다. 한상훈 교수는 “현재 피의사실공표죄가 실효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국민의 알권리 및 언론의 자유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사후적으로 수사기관의 공표, 브리핑에 대해 형벌을 부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며 “사전에 방지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에서 유사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김승원 의원은 이런 내용을 반영해 형사소송법 개정안도 함께 내놓았다. 개정안은 피의자가 법원에 피의사실공표 금지를 청구하면 법원은 모두 인용하거나 일부라도 금지를 명령할 수 있게 했다. 명령 전에 심문 절차도 거쳐야 한다. 금지 명령을 위반하면 5년 이하 징역, 10년 이하 자격정지에 처할 수 있게 했다(형법 개정안). 피의사실공표죄보다 처벌 수위를 높인 것이다.
한 교수는 위법하게 공표·유출·누설된 피의사실은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피의사실공표가 반복되면 아예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는 것을 제안했다. 법원이 언론에 보도를 자제 요청하는 방안도 언급했다. 그는 “언론사 기자나 직원에 대해 처벌을 확대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고려할 때 어렵겠지만, 보도자제의 요청은 가능할 것”이라며 “기소가 돼 공판이 시작되면, 공판정에서 자유롭게 진술 내용을 취재해 보도하는 것은 허용되기 때문에 일시적인 보도의 자제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와 맞물려 언론의 자정 노력 또한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수사기관의 단순한 ‘스피커’가 아니라 해당 내용을 검증하고, 구체적인 지침 등을 만들어 보도에 신중을 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